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의 한국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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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의 한국 언론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970년대를 관통하며
1/시대적 배경
2/정부의 언론정책

Ⅱ.시대흐름과 사건들의 인과성
1/시대를 읽는 눈
2/언론사와 정권의 유착
3/민중 분노의 발현 - 1차 언론자유수호선언
4/10월 유신 - 2차 언론자유수호선언
5/언론노조의 결성 - 자유언론실천선언
6/정권의 반격 - <동아일보> 광고탄압
7/동아투위와 조선투위
8/언론자유운동의 다양한 흐름과 평가

Ⅲ.1970년대 언론자본의 축적과정
1/신문 기업의 재벌화 및 독점화
2/광고 시장의 성장
3/소결론

Ⅳ.1970년대 곡필의 실제
1/유신선포에 대한 지지
2/유신헌법에 대한 찬양
3/긴급조치 시대의 곡필

Ⅴ.결론을 대신하여

<별지#1>
언론통제의 조건-경제발전과 정치의 권위주의화
<별지#2>
10.24 자유언론실천운동 진행 일지
<별지#3>
동아·조선투위 기자들의 증언
<별지#4>
1970년대 방송의 변화

본문내용

아픈 추억(1975년)
愼洪範 - 74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조선투위 위원
편집국장은무슨 자격으로 와서 이야기하는 것이냐신문은 국장 책임 하에 만들어지는 것인데, 이것은 편집권 침해가 아니냐.고 우리들의 말을 간단히 일축했다. 우리는 우리의 의견제시가 편집권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당한 압력이나 석연치 않은 과정을 통해 기사가 실리는 것이야말로 편집권을 침해당하는 것이라고 거듭 설명했다. 우리의 행위는 오히려 침해당하고 포기되고 있는 편집권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다음날인 12월 17일 오후 편집국장을 통해 회사 징계회의의 견책을 통고 받았다. 위계질서를 파괴하고 편집권을 침해했으니 앞으로는 절대 이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행동이 있을 때는 어떤 처벌도 달게 받는다는 내용의 시말서를 그날 중으로 써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징계란 회사 내의 재판행위인데 회사가 편집국장 한 사람의 당사자 말만을 듣고 우리에게는 이야기나 해명의 기회를 전혀 주지 않은 채 징계했다는 것은 지극히 불공평하다는 점, 언론자유 아래서 신문을 잘 만들어 보려고 국장에게 의견을 말한 것이 어째서 죄가 되느냐는 점을 들어 시말서 쓰기를 거부하였다. 그 이튿날 18일, 아침에 출근해 보니 편집국 입구 벽에는 우리를 해임한다는 회사 측의 방이 붙어 있었다.
1970년대 방송의 변화
1/ 영화의 몰락을 예고한 TV의 성장
1960년대 후반 방송계엔 큰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66년 정부는 전자산업을 수출육성 산업으로 지정했고, 69년엔 전자산업육성법을 공포하여 전자산업 지원에 박차를 가했다. 이 같은 정책은 TV수상기의 급격한 증가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70년 서울의 TV 보급률은 30%선을 상회했다. 한국영화가 1969년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TV가 영화관객을 안방에 주저앉힌 것이다.
2/ TV에 가해진 정치적 입김
71년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를 앞두고 TV에 저녁 ‘뉴스쇼’가 등장했다. 앵커맨을 기용하고 현장성을 살린 TV다운 뉴스 보도방식을 시작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과 병행하여 TV보도는 위력을 발휘했는데, 이에 따라 텔레비전을 정치에 활용하여 위정자의 치적 홍보와 이미지 조작에 교묘하게 활용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MBC는 68년부터 라디오 방송망을 확장하기 시작했고 곧 TV방송망 확장으로 이어졌는데, 여기엔 ‘정치’가 강하게 개입하였다.
3/ 아폴로 11호,「아씨」「여로」
TV의 위성중계는 사람들로 하여금 TV에 더욱 매료되게 만들었는데 60년대 후반 가장 큰 TV이벤트는 인간의 달 착륙이었다.
TV드라마도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는데 특히 70년 3월 2일부터 방송된 TBC의 「아씨」는 대성공을 거두어 방송사들간 치열한 일일연속극 경쟁을 낳게 만들었다. 72년 KBS가 방송한 「여로」의 인기도 대단했는데 일화로 그 시간에 20분간은 영화 상영을 중단했다는 얘기도 있고, 7시 저녁 수업시간에 수강생들이 다 빠져나가 강의실이 텅 비기도 했다고 한다.
4/ 한국방송공사의 탄생
72년 12월 30일 비상 국무회의는 한국방송공사법을 확정 공포했고 73년 3월 3일 KBS는 한국방송공사로 개편되었다. 이는 KBS를 통한 권력 홍보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고, 이에 관한한 KBS는 박정희 개인의 사영 방송이었다고 해고 과언이 아니다.
73년 3월에 개정된 방송법은 그간임의 단체였던 방송윤리위원회를 법정기관으로 하여 제재 규정을 강화하였으며, 방송국에 심의 실을 두어 사전 심의할 것을 의무화하고 방송편성 기준에서 교양방송을 종래의 20%에서 30%이상으로 높였다.
이 당시의 방송은 방송 저널리즘의 기능은 아예 포기한 채 권력의 홍보매체이자 국민의 ‘정치로부터의 도피’를 부추기는 도구로 기능하였다.
5/ 겉 다르고 속 다른 방송정책
당시의 TV는 재미있었다. 정권에 대해 입바른 소리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광고시장을 놓고 다퉈야 하는 신문의 입장에선 너무 재미있는 TV를 곱게 봐주긴 어려운 일이었다. 동아일보는 사설에서 다음과 같이 공격하기도 했다.
‘세 TV방송국이 방영하고 있는 일일연속극은 모두가 비윤리적이고 퇴폐적인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을 뿐 아니라 오락프로그램인 이른바 코미디물이나 쇼프로그램 등 역시 차마 눈뜨고 보기 역겨울 정도로 유치한 것이 아니면, 이 또한 거의가 저속하기 이를 데 없는 것들이라는 각 계로부터의 비난이 바로 그것이다. 일일연속극을 살펴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같이 저속하고 비윤리적인 것만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지 사뭇 아연해진다. 어떤 것은 시청자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엿가락처럼 억지로 늘이고 있는 후안무치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불륜한 내용의 것이 있고, 사극 등에서는 국적을 분별할 수 없는 웃기는 내용이 보통으로 방송되어 시청자들을 우롱하고 있는데 더한층 개탄을 자아내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발끈하여 히스테리를 부린 사람은 시청자가 아니라 오히려 박정희였다. 국무회의에서 느닷없이 외래어를 쓰지 말고 우리말로 고쳐 쓰라고 하고 TV프로그램에서 코미디를 일제히 폐지하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지시가 전반적인 문화 정책과는 전혀 아귀가 맞지 않는 히스테리성 발언임을 꼬집지 않을 수 없다.
<참고문헌>
강준만, 권력변환, 인물과 사상사, 2000
조선투위, 자유언론, 내릴 수 없는 깃발, 두레출판사
한국기자협회, 언론자유수호의 발자취 : 기자협회 삼십 년사, 한국기자협회,
송건호 외, 한국 언론 바로보기 100년, 다섯 수레, 2000
김왕석 외, 한국 언론의 정치경제학, 아침, 1990
김삼웅, 곡필로 본 해방 50년, 한울, 1995
조상호, 한국 언론과 출판저널리즘, 나남, 1999
한국 언론연구원, 한국 언론의 현 주소, 문성인쇄, 1991
정진석, 한국현대언론사론, 전예원, 1989
박현채,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 소나무
동아일보 홈페이지, www.donga.com
조선일보 홈페이지, www.chosun.com
민언련 홈페이지, www.ccdm.or.kr
국회도서관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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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04
  • 저작시기20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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