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원자력은 안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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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과연 원자력은 안전한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원자력에 관해서

2. 원자력을 사용하는 이유

3. 세계 최대의 대참사,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사고

본문내용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어봉을 과잉 인출하여 6~8개만 남게 되었고, 이런 상태에서 원자로가 200MW(t) 근방에서 안정된 것은 4월 26일 01:00 경이었다.
(5) 냉각수의 유량이 증가하여 증기압이 감소했는데 운전원은 저증기압 신호에 의한 원자로정지를 방지하기 위해 원자로 자동정지계통을 꺼버렸다. 이 상태에서 실험이 개시되자 원자로 정지로 돌입하고 외부전원 대신 터빈의 관성회전에 의한 전력이 원자로의 계통에 공급되기 시작했다.
(6) 저출력으로 운전되던 터빈의 관성에 의한 전력은 충분하지 못했고 따라서 냉각수 펌프회전이 줄어 냉각수 유량이 감소하여 냉각수 온도가 상승하자 증기생성에 의해 정기포계수의 작용으로 원자로 출력이 상승하기 시작했으나 제어봉 구동속도가 늦어 운전원은 이를 제어할 수 없었으며 결국 정상 전출력의 약100배(30만 MW) 정도까지 출력폭주가 일어났다.
(7) 발열의 급격한 증가로 핵연료가 파손되자 고온의 핵연료가 물과 반응하여 발열함으로써 이를 더욱 악화시켜 원자로심을 파괴하는 증기폭발을 일으켰으며 2~3초 후에 제2폭발이 뒤따랐다. 폭발을 일으킨 원인은 확실히 규명되지 않았지만 처음 폭발은 증기폭발로 간주되며, 두 번째 폭발에서는 수소가 주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3) 사고의 경과
(1) 두 차례의 폭발이 4호기 노심은 물론 원자로 건물의 지붕까지 파괴하자 많은 고온고방사능의 핵연료와 흑연 파편이 공중으로 비산하였다. 여러 가지 파편이 공중 1km 까지 치솟았고 무거운 것은 부지 근처에 낙하하였으나 불활성기체를 포함하는 가벼운 성분들은 바람을 타고 서북쪽으로 날아갔다.
(2) 4호기 원자로 잔해, 건물 지붕 등에 발생한 화재는 방사성물질의 방출을 증가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를 고공으로 끌어올려 피해를 원거리까지 확대시켰다.
(3) 화재진압에 100여명의 소방대원들이 투입되었는데 이들이 매우 많은 방사선 피폭을 받았다.
(4) 원자로심 부위의 흑연 화재는, 이를 진압하려는 시도가 증기폭발이나 핵임계를 유발할지도 모른다는 실제적인 두려움 때문에 신속히 진화되지 못해 10여일이나 지속되어 방사능 방출을 배가했다.
4) 초기 비상대응과 사고수습
(1) 국가적 비상사태에 대한 지휘권이 부여된 국가위원회(모스크바 소재)까지는 사고내용이 즉시 보고되었으나 대응 지휘본부인 연방민방위본부에 상황이 접수된 것은 약 2시간 이후로서 경보의 전파에 상당한 시간지연이 있었다.
(2) 비슷한 시각에 우크라이나 비상본부가 프리피야트에 설치되었고 사고지역에 차량출입의 통제가 개시되었다. 26일 정오께부터 인근 지역에 대한 방사선 측정이 실시되었다.
(3) 4월 27일부터 노출된 원자로 상부에는 헬기를 이용하여 수백 톤의 붕소(핵임계 방지), 납(방사선 차폐), 진흙과 모래(방사능 차단 및 필터), 백운석(열 흡수 및 탄산가스 생성으로 소화 보조) 등이 투하되었으나 후일의 평가는 이런 물질들이 적절한 위치에 투하되지 못했고 열 발산을 차단해 원자로심부의 과열을 초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4) 노심 용융물이 하부 지층까지 침투할 우려에 대비하여 5월 9일부터 15일간 400여명이 동원되어 원자로 하부를 굴착하고 냉각계통을 가진 강화콘크리트판을 설치하였다.
(5) 공식발표가 없었음에도 대부분의 프리피야트 주민은 사고 7, 8시간 뒤에는 사고 사실을 인지했으나 스스로 대피한 사람은 극히 일부였다. 26일 오후 늦게부터 바람이 프리피야트 방향으로 향함에 따라 주민의 소개가 권고되었으나22:00경에야 27일 소개를 결정하고 밤새 1,200여대의 버스를 동원했다.
(6) 프리피야트 주민의 소개에 대해 국가위원회 위원장이 최종 승인한 것은 27일 07:00였으며 정오경 주민들에게 공식 소개를 발표하고 사고발생 36시간이 지난 14:00부터 소개가 개시되었다. 소개는 원활히 진행되어 40,000여명의 시민이 세 시간 동안에 소개를 완료했다.
(7) 5월 2일에는 소개지역을 원자로 중심 반경 30km까지 확대했으며 5월6일까지 70,000여명의 지역민을 추가로 소개하고 이 구역을 금지구역(the zone)이라 불렀는데 이 구역은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존재한다. 이후 50,000여명이 더 소개되어 소개주민의 총수는 167,000명에 이른다.
(8) 4호기 잔해에 대해서는 10층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구조물로 둘러싸는 공사의 설계와 시공이 신속히 진행되어 1986년 11월 중순에 완료하고 이를 석관(sarcophagus)이라 부르고 있다.
5) 사고 후 체르노빌 핵발전소 완전 폐쇄
체르노빌 핵발전소는 1986년 4기 폭발사고 이후 2기는 1991년, 1기는 1996년에 폐기되었고 마지막으로 3기가 2000년 12월 15일 완전가동을 중단했다.
6) 사진으로 보는 체르노빌
(1) 갑상선암 수술의 흉터가 보이는 12살 우크라이나 소녀의 초상화
(2) 체르노빌 근방에서 방사능 노출로 인해 사망한 아이의 장례식
(3) 14살인 타냐 체르누이쉬(Tanya Chernuish)는 갑상선암으로 고통받아 왔고 1986년 체르노빌 핵사고 발생 당시에는 4살이었다. 결국 1997년 사망했다.
7) 체르노빌 사고 후 다른 나라의 대응
사고 당시 구소련은 이를 대외적으로 비밀에 부쳤다. 그러나 이미 누출된 많은 양의 방사능은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다음은 체르노빌 방사능 오염의 확산을 나타낸 것이다.
(1) 스웨덴
대기의 방사능물질 오염농도가 갑자기 높아지기 시작했고, 이를 이상하게 여긴 과학자들은 역추적하여 결국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났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다.
(2) 독일
동구라파에서 독일의 국경을 넘어 들어오는 모든 화물차량들에 대한 일체 검문을 하기 시작하였고, 규제치 이상의 방사능물질에 오염된 화물차량들은 독일 국경에서 되돌려 보내졌다.
독일은 사고가 발생한 체르노빌로부터 1,000km나 떨어졌으나 숲속에서 버섯채취도 금지시켰고 주부들은 직접 방사능을 측정할 수 있는 간단한 측정기기들을 구입하기에 바빴다.
결국 독일 바이에른 지방의 우유가 방사능에 오염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나중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 때 방사능에 오염된 우유로 만들어진 분유가 한국으로 수입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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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8.11.28
  • 저작시기2008.1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497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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