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이후 불평등조약의 내용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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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들어가면서

Ⅱ.본론

1. 아편무역

1) 아편과 중국

2) 아편과 영국

3) 무역량

2. 제 1차 중․영 전쟁

1) 청조의 아편대책

2) 영국의 중국무역정책

3) 전쟁의 발발

4) 남경조약의 내용과 의미

3. 제 2차 중․영 전쟁

1) 조약개정 문제

2) 애로호 사건(1856~1860)과 천진조약

3) 북경조약과 그 영향

4. 아편전쟁의 역사적 성격

Ⅲ. 나오며

본문내용

에 대한 화친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개항장이 16개로 늘어나고 내지 여행권, 내해항해권이 보장되면서 중국은 서양의 상품시장, 원료시장으로 변했다. 외국상품에 대한 내지통관세의 인하는 청의 경제에 큰 타격을 입혔다. 예컨대 이후 면제품이 대량으로 들어와 중국산 면포, 면사를 대신하게 되면서 중국 면업에 심대한 타격이 되었다.
또한 외국선교사가 자유로이 교회를 설립할 수 있게 되고 토지를 빌리거나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인 토지조매권(토지를 빌리거나 매입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면서 중국 내륙지역에 중국인 신자가 증가하였다. 이것은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중국인사회에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즉, 공동체 내의 교인과 비교인 사이의 갈등이 커지면서 양자 간의 충돌을 넘어서 반기독교운동으로 확산되었다. 또 외국 군함이 중국 연해는 물론이고 내륙하천까지 들어올 수 있게 되어 중국의 주권에 커다란 위협을 가하게 되었다.
제 1,2차 중영 전쟁 패배로 인한 남경조약과 북경조약을 통해 중국은 반식민지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세계자본주의체제 내의 종속적 시장으로 편입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에서 탈피하려는 반제국주의운동이 중국근대사의 주요과제로 등장했다. 이와 더불어 중화제국의 수도였던 북경을 함락시킨 서양의 위력, 서양문물에 대한 지배층의 관심 증가, 중국사회를 개혁하려는 기운의 가속화는 결국 양무운동의 계기를 마련했다.
한편 서구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청조를 본 민중은 청조에 대한 반란을 꿈꾸게 되었다. 반란군에는 청의 지배에 강하게 반발해 온 남쪽의 민중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반란군이 세운 태평천국이 10여 년 동안 청과 대치할 수 있을 정도로 위세를 떨치자 청은 안팎으로 위기에 몰렸고 개혁을 통한 자강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해졌다.
4. 아편전쟁의 역사적 성격
아편전쟁은 중국뿐만이 아니고 동양사회 전체에 커다란 충격을 준 획기적 사건이다. 중국의 근대사를 아편전쟁이 시작된 1840년을 기점으로 하는 것도 아편전쟁이 차지하는 역사적 성격 때문이라고 하겠다.
우선 1840년의 아편전쟁은 불평등조약 체제의 확립과정이고, 1856년의 애로호사건은 그것의 확대과정으로 보아야 한다. 이와 함께 아편전쟁의 정치적 성격은 지금까지 세계의 중심이라고 자부하던 중화주의가 여지없이 짓밟혔고 외국의 군함이 내지 깊숙이 드나들게 되면서 청의 주권을 유린하고 더할 수 없는 수치심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적으로는 중국이 서양의 상품시장, 원료의 공급지로 전락되면서 국민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특히 아편무역이 합법화되면서 아편의 수입증대를 가져와 중국사회를 마비시키고 제국주의 침략의 무자비함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사상 문화적인 면에서 서양의 우세한 군사력<과학문명>에 대해 눈을 돌리고 이에 따라 일부의 지식층을 중심으로 양무운동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외국인 선교사의 자유로운 포교활동이 시작되면서 유교이념과는 상반되는 크리스트교 문명에 대해 끊임없는 저항과 갈등을 가지면서 이후의 반기독교운동으로 치닫게 되었다.
아편전쟁은 결국 중국이 세계자본주의 시장 속으로 편입되는 이른바 반(半)식민지화의 길을 열게 되었고 이후의 중국역사에서는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투쟁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중국침략은 시작되었고, 이에 따라 반식민지사회로 전락되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에 의한 서구세력의 유입으로 중국은 정체상태에서 깨어나 새로운 변화를 시작하면서 국제적인 고립상태를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아편전쟁은 청조체제의 사회적 모순을 확연히 드러내는 계기가 되었고 이는 종래의 농민반란과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른 서구의 충격이란 점에서 그 역사성이 뚜렷하다. 아편전쟁은 중국사나 동아시아사의 입장에서 볼 때에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으며, 이는 동양뿐만이 아니고 제국주의가 전 세계에 확대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 역사적 성격을 파악할 수 있다.
Ⅲ. 나오며
본래 청조는 중화세계에 군림하는 지고의 통치자였다. 그 독존의 지위는 정치적 문화적 우월에 입각한 것으로, 주변제국을 자신보다 지위가 낮은 조공국과 같은 위치로 부여해 왔다. 아편전쟁 이전에는 영국 등의 서양제국도 그러한 취급을 당하여 왔고, 유명한 광동(廣東)무역도 조공의 한 형태였다. 이와 같은 중화사상에 근거한 중국우위의 대외관계가 밑에 깔려 있어서, 역으로 서양제국에 의한 불평등조약에 기초한 종속적 지위를 강요당하는 것으로 중국의 근대는 개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제 중국은 문화적 우월성과 국력을 배경으로 세계의 중심에 군림하며 인접국으로부터 조공을 받는 동아시아세계의 구심점이라는 전통적인 관념을 고수할 수 없게 되었다.
아편전쟁에 있어서 그리고 그 시대상황에 있어 청나라의 고관대작들과 황제들이 범한 최대의 실수는 고대 《병법》을 저술한 손자의 전투 규범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손자는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百戰百勝)’이라는 여덟 자로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쟁에 임할 때마다 반드시 승리를 한다'는 전쟁의 기술을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말이다. 말 그대로 전쟁 상대인 영국에 대해 잘 모르고 전쟁을 치러야했던 중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은 서양의 과학 기술의 정도를 알지 못했으며 중화주의 사상에 빠져서 자신들을 최고라고만 여기고 시대변화에 대응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전쟁의 중요한 패배원인 중 하나일 것이다.
※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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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이 츠네오 지음, 이진복 옮김,『대청제국』,학민사, 2004, p. 172~182,189
드니 이요 지음/김주경 옮김,『홍콩 : 중국와의 해후』, 시공사, 1998, p.14~15, 21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오근영 옮김,『하룻밤에 읽는 중국사』, 중앙M&B, 2003,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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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05
  • 저작시기20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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