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장로교회 예배순서][장로교회 정치][미국 장로교회][한국 장로교회]장로교회의 역사와 장로교회의 예배 순서 및 장로교회의 정치 그리고 미국에서의 장로교회, 한국에서의 장로교회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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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장로교회 예배순서][장로교회 정치][미국 장로교회][한국 장로교회]장로교회의 역사와 장로교회의 예배 순서 및 장로교회의 정치 그리고 미국에서의 장로교회, 한국에서의 장로교회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장로교회의 역사

Ⅲ. 장로교회의 예배 순서
1. The Book of Common Worship(1946)
2. The Worshipbook(1970)
3. Book of Common Worship(1993)

Ⅳ. 장로교회의 정치
1. 장로들에 의한 정치
2. 교회평등
3. 장로교회의 회의의 단계적 구성
1) 단계적 구성원칙
2) 교회회의의 권위
3) 교회회의와 회중의 관계
4) 각 회의의 임무
5) 개교회의 자치권
6) 상회의 권위

Ⅴ. 미국에서의 장로교회
1. 장로교의 정착과 조직
2. 대각성 운동과 분열
3. 독립전쟁기의 교회
4. 제 2차 대각성 운동
5. 남북 교회의 분열, 그리고 재연합

Ⅵ. 한국에서의 장로교회

참고문헌

본문내용

1837년과 1838년 총회를 거치면서 나누어지게 되었다. 그 후 시민전쟁(1861-65)이 다가오기 전인 1857년에 신파 장로교회가 다시 분열을 하고, 1861년 구파 장로교회가 나뉘어졌다. 그러다가 남쪽의 신구파가 1864년에 연합하여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로, 북쪽의 두 파는 1861-1870 사이에 연합하여,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로 부르게 되었다. 남쪽 교회들은 남북 전쟁 기간을 통해서 노예 제도를 찬성하는 입장에 섰고, 북쪽 교회들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서 싸웠다. 전쟁은 북쪽의 승리로 끝났으나, 그들의 상처는 쉽게 아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로교 연합 운동은 계속해서 일어나 1906년에 PCUSA와 CPC(Cumberland Presbyterian Church)가 다시 결합을 하는 결실을 맺기도 하였다. 1950년대 초까지 미국은 PCUSA, PCUS, 그리고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회인 UPCNA(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of North America) 등 세 계열이 장로교회로 존속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58년에 PCUSA와 UPCNA가 연합하여 UPCUSA(the United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1983년 조지아주 아틀란타에서 남북 장로교 총회가 연합으로 모여 통합을 선언함으로써, 미국 장로교회는 모든 분열의 역사를 매듭짓고 새로운 출발을 이루게 되었다.
Ⅵ. 한국에서의 장로교회
미국 남 장로회에서는 1892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선교사업을 우리나라에 개시하게 된 동기나 과정은 다음과 같다. [한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언더우드 목사가 189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돌아갔을 때 신학교 연맹 (The Inter-Seminary Aliance) 서 주최한 내슈빌(Nashville) 대회에서 선교강연을 할 기회가 있었다. 여기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레이놀드(William D.Reinolds) 는 한국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그 후에 남장로교 총회 외지선교회에 선교사로 한국에 보내달라고 지원하였다. 레이놀드 외에 데이트(L.BLTate), 죤스(Cameron Johnson), 젼킨(W.M Junkin)의 인물들이 함께 한국선교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선교회에서는 아직 한국 선교사업은 착수할 단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레이놀드와 젼킨은 한국 선교의 실현을 위하여 매일 3시에 기숙사에서 합심 기도회를 가졌다. 뿐만 아니라 레이놀드는 세 사람의 선교 동지와 함께 각지를 순회하면서 언더우드 목사를 강사로 하여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열심히 강조하였다. 교회 신문에도 한국에 관한 기사를 많이 발표하였다. 드디어 독지가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뉴욕에 사는 죤 언더우드 (John T. Underwood)란 사람으로 2만5천 달러를 한국 선교를 위하여 사용해 달라고 기탁하였다. 그렇게 되자 외지 선교회에서도 선교에 착수하기로 결의하게 되었다. 레이놀드는 떠나기에 앞서 한국 선교 7인 선발대에 동참하기로 뜻을 함께 한 볼링(Patsy Bolling) 양과 결혼하였다. 드디어 1892년 2월에 레이놀드 부부와 젼킨부부 그리고 데이트와 그의 누이 동생매티 데이트(Mattie S.Tate) 데이비스(L.Linnie Davis) 등이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해 10월 18일에 그리고 나머지 몇 사람은 11월 3일에 서울에 각각 도착하였다. 이렇게 하여 남 장로회의 한국 선교의막은 올려진 것이다. 그들은 얼마동안 서울에 머물러 있으면서 한국말을 익힌 다음에 선교 활동에 나서게 되었는데 주로 호남지역인 전라도 일원을 선교구역으로 생각하여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성과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도착한 그해 연말 크리스마스 후에 미국 북 장로회 파송인 마펫(Samuel A.Moffett) 선교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공주 지방을 방문하여 선교 적지로서의 여부를 타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젼킨과 테이트목사가 함께 전주를 찾아가 시찰하였다. 1893년 2월 레이놀드 선교사는 비서인 정해원을 전주에 보내 선교 사업을 위한 전초기지가 될 기지를 구입하였다. 그는 전라도의 서해안 관문인 군산을 방문하고 그리고 연이어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운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쭉 순방 하면서 무척 만족하였다. 레이놀드 목사는 한국교회 교역자 양성를 위한 신학교육 이념을 수립하는 문제에 있어서 적극적이었다. 그는 1917년부터는 평양 장로회 신학교교수로 부임하여 어학과 함께 조직신학 분야를 담당하여 가르쳐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에 있어서 자신의 지도 이념을 구체화 충분한 기회를 가졌다. 그의 한국교회 지도자 양성의 이념은 성령 충만한 성신인으로 오직 키우는데 있었다. 오직 한국교회를 하나님 말씀의 터 위에 선 성령 충만한 교회로 만들면 된다는 것이었다. 레이놀드 목사는 장로회신학교 교우지인 신학지남의 편집인으로 있으면서 보수주의 신학노선의 많은 논문을 게재하여 한국교회를 그러한 방향으로 인도하는데 주력하였다. 실로 한국교회를 위한 신학교육은 장로교에 있어서 영적 훈련 면에 있어서 우수하였다. 그러나 지적 훈련 면에 있어서 빈약하였다. 아쉬움, 뒤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일제시대 하에서 수난과 박해가 중첩되는 그 시기에 있어서 성령충만한 교회의 신앙노선은 필요하였다.
참고문헌
1.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2002), 헌법, 서울 : 대한 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2. 이장식(1988), 한국교회의 어제와 오늘, 서울 : 대한기독교출판사
3. 이철호, 장로교회의 역사와 신앙
4. 이형기(1994), 세계 교회사(II), 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5. 피터 와그너, 이재범 역(1987), 교회성장학 개론, 서울 : 솔로몬출판사
6.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1989), 한국 기독교의 역사Ⅰ, 서울 : 기독교문사
7. J. W. Cowand, 이장식 역(1977), 기독교 사상사(II),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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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1.08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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