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인간관,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 실존론과 예정론,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 가르침,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 신(神)이해와 펠라기우스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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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과 인간관,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 실존론과 예정론,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 가르침,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 신(神)이해와 펠라기우스 논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

Ⅱ.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관

Ⅲ.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실존론

Ⅳ.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론

Ⅴ.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1. 죄와 의지의 자유
2. 은총
3. 구원의 본질
4. 예정

Ⅵ.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신(神)이해

Ⅶ.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과 펠라기우스 논쟁
1. 어거스틴
2. 펠라기우스
3. 반 펠라기우스 주의(Sem-Pelagians,Semi-Augustinians)

참고문헌

본문내용

, 그가 인간사를 주관한다는 점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또한 스토아적 유물론과 범신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때 나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외의 다른 실체를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후부터는 당신을 인간의 형체를 가진 존재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존재를 달리 이해할 줄을 몰랐다. …나는 비록 당신을 인간 육신의 모습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도 어떤 공간- 세상 안에 스며들어 있든지 혹은 세상 밖의 무한한 공간에 퍼져 있든지 간에 -을 차지하고 있는 물체와 같은 존재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당신도 무한한 공간을 통해 어디에든지 존재하시는 물질적인 실체, 즉 전 세계의 덩어리에 침투해 있고 또한 그것을 넘어 끝없이 무한한 공간에 두루 퍼져 있는 큰 물질적 실체로 이해했다.\"
이 진술을 보건대, 20세의 청년 아우구스틴은 신을 우주를 지배하며 포괄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단일한 원리로서 이해했다. 스토아적 신 이해는 그 유물론적 면에서는 마니교의 신 이해와 일치하는 점이 있으며, 다른 한편 일원론적 근원으로서의 신 이해의 관점에서는 마니교의 이원론과 상충한다. 전자가 아우구스틴을 마니교로 끌어들이는 통로가 되었다면, 후자는 그로 하여금 마니교에서 멀어지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또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점은 아우구스틴은 네오플라톤주의를 알게 되면서 스토아주의를 신랄히 비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 배후에는 늘 일정한 스토아적 잔재가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지혜, 진리와 행복의 연결 외에도 특히 물질 개체를 지향하는 실재 개념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므로 그가 후일 성서 해석에 있어서 스토아적 실재 개념을 통하여 지성주의적 사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청중들의 현실 이해에 부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스토아적 이해는 그의 네오플라톤주의 내지 기독교적 인식과는 조화를 이루기 어렵다. 여기에 그의 사상적 갈등 요인이 있다.
Ⅶ. 성 어거스틴(성 아우구스티누스)과 펠라기우스 논쟁
1. 어거스틴
초대교회에서 중세교회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활동하였던 신학자 어거스틴은 초대교회 신학을 집대성했고 중세교회의 문을 열었으며 바울 이래 가장 깊고 영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어거스틴은 원죄는 유전되며 아담의 모든 후예는 선을 택할 자유가 없고 다만 인간의 자유의 죄를 짓는 데만 자유롭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구원은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총으로 하나님의 예정에 속한 것으로 인간은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하며,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죽음과 유아세례문제에 대하여서는 죽음은 인간의 타락의 결과이며 유아도 죄가 유전되기 때문에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간의 도덕적 노력을 제거시키고, 인간이 선하게 되려고 노력하지 않음으로써 이것을 보완하기 위해 중세 공덕사상이 나온다.(인간의 책임성을 부인)
2. 펠라기우스
영국의 수도사로 에베소의 장로가 된 펠라기우스는 원죄를 부인하며 아담과 이브의 죄는 그들에게만 작용하고 후손에게는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인간에게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가 있어서 개인의 노력과 의지에 의해서 구원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예수 없이 세례를 통하여 죄사함을 받을 수 있고, 율법도 사람을 천국으로 인도한다고 주장하며, 죽음은 죄와 관련 없는 자연적인 것으로 유아는 죄가 없기 때문에 유아세례는 불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431년 3차 총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3. 반 펠라기우스 주의(Sem-Pelagians,Semi-Augustinians)
카톨릭교회에 의해 펠라기우스가 정죄를 받았지만 모든 카톨릭교도들이 어거스틴의 의견에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는다. 제롬은 은초이 구원에 불가결하다는 것은 인정하였으나, 하나님 의 은총이 불가항력적이라는 생각은 없었고, 인간의 의지가 회심에 한 몫의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했고, 빈센트는 은총과 예정에 대한 어거스틴의 교리가 카톨릭전통에 근거가 없는 새로운 주장임을 밝혀 공격하였다. 이 동조자들은 16세기에 와서 모든 점에서 어거스틴과 의견을 같이 하지만 예정설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을 부인하였기에 Semi-Pelagians,Semi-Augstinians)라고 불렀다. 이에 529년 오렌지 회의가 소집되어 반펠라기우스 논쟁이 끝을 맺는데, 그 결정사항은 원죄를 긍정하고 인간이 하나님께 돌아가려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은, 예수를 믿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온다고 하였으나, 예정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Augustine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 같지만 펠라기우스의 주장을 부인하지 않음을 보여 주었고,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은총의 전수를 세례에 국한 시켜 은총의 세례전적 특질과 선행의 공덕을 표면에 내세움으로써 어거스틴 사상은 승인하였으나, 대중적인 카톨릭 종교 개념의 방향으로 수정을 겪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런 사상에서 중세 로마 카톨릭 신앙의 기초를 형성한 공덕사상이 나왔으며, 칼빈은 인간의 노력, 공적이 인간의 구원사역에 동참할 가능성은 1%도 없다고 본다.
참고문헌
◈ 브라운 피터, 차종순 역, 어거스틴 생애와 사상, 서울 : 한국장로교출판사, 2002
◈ 이석우, 어거스틴의 생애와 사상체계(I), 신학지남, 통권 187호, 1980
◈ 어거스틴, 조호연 역, 하나님의 도성, 서울 :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2
◈ 야마다 아끼라, 윤원호 역, 어거스틴 사상강좌, 서울 : 대한기독교서회, 1989
◈ 홍정수, 성어거스틴의 리듬 이론, 춘계 이종성박사 화갑기념논문집, 장로회신학대학 출판부, 1982
◈ F.R.Montgomery Hitchcock, 심이석 역, 성어거스틴 신국론 요약 & 신앙핸드북(St. Augustine`s Treatise on the City of God & The Enchiridion), 서울 :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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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21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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