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을사보호조약][일제][을사조약체결][식민근대화]을사보호조약 체결, 을사조약의 강제성, 역사상 을사조약의 위치, 을사조약이후 구체제의 해체, 을사조약이후 일제치하의 식민 근대화에 관한 분석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을사조약][을사보호조약][일제][을사조약체결][식민근대화]을사보호조약 체결, 을사조약의 강제성, 역사상 을사조약의 위치, 을사조약이후 구체제의 해체, 을사조약이후 일제치하의 식민 근대화에 관한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을사보호조약 체결

Ⅲ. 을사조약의 강제성

Ⅳ. 역사상 을사조약의 위치

Ⅴ. 을사조약이후 구체제의 해체

Ⅵ. 을사조약이후 일제치하의 식민 근대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로 떠오르게 된다. 물론 30년대 후반을 전후로 동양(문화)에 대한 비판과 거부가 존재했었다. 김기림은 동양문화에의 몰입은 경솔한 사색 속에 즉흥적으로 떠오르기 쉬운 아름다운 포말로 비유하면서, 근대는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므로 근대성을 거부하고 동양으로 회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의 이런 주장은 근대의 서구성에 대한 믿음을 여전히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1930년대 동양주의는 문화계 전반에 걸쳐 폭넓게 수용된다. 일본의 침략주의가 노골화되면서 동양연대의 허구성이 드러나자, 정치적 측면에서 동양주의는 일본을 제외한 동양 각국에서 현실적 설득력과 당위성을 상실하지만, 그것이 갖는 제국주의 침략의 이데올로기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측면에서 동양주의는 적극적으로 논의된 것이다. 따라서 당시 문학의 농민문학이나 미술에서의 향토미술 등은 단순히 체제주의나 소재주의적인 측면으로만 접근하기 어렵다. 이는 복잡한 동양주의의 이식과 식민지 근대성의 구조가 내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해답을 위해 일본의 동양주의가 한국의 식민지 근대체제 내에서 어떻게 작동되었는지를 살펴봐야만 할 것이다.
일본에게 있어서 동양주의와 동양담론은 식민의 문명화 작용의 측면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동양주의는 일본을 포함한 동양 내부에 대한 문화적 동일성과 서구의 문명에 대한 특이성이라는 이중 구조를 바탕으로 주장되면서도, 그 실제에 있어서 동양주의는 일본의 절대적 우월과 다른 동양에 대한 배타적 타자화를 통해 관철된 위계적인 문화담론이자 질서체계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동양주의의 작동방식은 식민지 한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투영된다. 즉 일본 스스로 동양문명 내에 존재하는 동양성의 적극적인 인지와 그것이 지닌 서양문명과의 대등한 문화적 가치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 한국의 문화적 특성을 조선성이라는 이름으로 폄하 규정한다. 그들이 말하는 조선성이란 바로 동양성의 원형으로써, 향토적, 자연적, 정체적, 원시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근대적이고 문명적인 일본의 동양성과 열등적인 비교를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러한 측면은 일본의 식민지지배 정책의 하나인 문화주의 정책의 외피를 띠고 강하게 추진된다. 조선 향토색을 요구하고 독려하고, 반도적인 것을 심사 기준으로 삼았던 1930년대 조선미전의 출품 경향들이 전형적인 예가 된다. 그러나 이는 실제에 있어서 일본 내지와 다른 후진적이며 열등한 외지로서의 지방색의 의미로 강조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 조선적인 것의 근간에는 전통이 존재했다. 일본은 식민지 한국의 조선성을 전통과 동일한 의미로 부각시킨 것이다. 따라서 전통 역시 향토적, 목가적, 녹향(푸른 고향) 따위와 동음이어가 되었으며, 이는 곧 지방색으로 연결되어 나타난다. 요컨대 전통은 19세기 말엽부터 식민지 초기에 걸쳐 서구적 근대화에 저항하기 위한 반근대화의 담론체계, 1920년대에는 퇴영적·보수적·반동적이라는 측면에서 근대화의 장애요인으로 근대 속에서 진동해왔다. 그러나 1930년대 식민지 근대에서 전통은 배척과 부정의 대상에서 새롭게 발견되어야 할 대상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전통은 식민지 근대 속에서 정확한 실체나 개념을 알기 어렵듯이, 때로는 봉건적, 때로는 복고, 혹은 유교적 체계질서 등과 동일시되어 왔다. 그러나 1930년대 재인식된 전통의 내용은 앞선 나열들을 염두 해 볼 때, 사뭇 다른 차원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과거의 유교적 질서관으로서의 전통이 탈각되고, 무속이나 전설, 풍속, 신화 등 토착적인 것들이 부각되는 한편, 이러한 여파로 미술에서는 민화나 공예 등이 장려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은 동양을 재인식하는 과정에서 일정 정도 유교적 사상과 세계관과의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였던 일본의 동양담론이 지닌 특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식민지체제에서 동양주의와 동양담론의 확산은 식민지 지배전략으로서만 그 효과를 나타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식민지체제에서 동양성이 수용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서구 중심적 문화로부터의 종속을 탈피하고, 식민지 지배체제와 서구 중심적 근대화에서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기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식은 물론 서구문명에 대한 동양문명의 대등함을 강조하는 동양주의의 근간을 따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일본이 자신의 근대적 동양성과는 상대적으로 열등화시키려 했던 조선성을 오히려 주체적으로 긍정하고자 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 하다. 또한 동양주의는 식민지체제의 현실을 담아내는 도구로써 인식되기도 했다. 식민지 지배전략을 통해 구현되는 조선성은 진정한 의미가 아닌 관념적 미학의 형태이므로, 식민지체제에서 피폐된 조선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만 한다는 현실주의적 맥락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향토색의 발현이 서구적인 것의 모방이나 민족주의적 태도를 통해서는 가능할 수가 없다는 인식도 혼재했다. 이러한 주장은 문화적 담론 내부에서는 순수예술 논의로 전달된 것이기도 하다.
동양주의의 담론체계 및 그것이 식민지 근대 안에서 작동된 방식은 단순하지 않고 모순적이며 복잡하다. 동양주의는 1930년대 일본의 식민지 지배정책의 동양담론과 문화주의와 중농주의의 배경 속에서 유교적 습속이나, 중화주의적 사상과는 다른 차원의 전통과 만나면서 서구중심의 근대화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는 하나의 경로로 인식되는 한편, 자생적이고 순수한 전통의 미학적 기조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기도 하면서 그 정치적 색채를 탈각시켜 나갔다. 또한 민족의 고유한 정서를 담아낸다는 차원에서 문화적 민족주의와도 맥을 닿아있는 등 매우 복잡한 층위 속에서 인식되고 부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강만길(1989), 한국근대사, 창작과 비평사(서울)
류재곤(1999), 통일사상 연구논총-통일사상에서 본 을사보호조약, 선문대학교 통일사상연구원
신국주(1992), 한국근대정치외교사, 거림
이현희(1992), 한국 근현대사의 쟁점, 삼영출판사
이현희(1997), 도전과 응전의 우리나라 근대 100년, 새문사
이야기 한국역사 편집위원회(1997), 이야기 한국역사, 풀빛, p.19~20
  • 가격5,000
  • 페이지수10페이지
  • 등록일2009.04.05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28150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