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후기부터 중세사회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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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한국사 시대구분의 문제점
Ⅲ.중세시대로의 이행과정
1.무신집권 이후 과도기적 단계
2.조선 건국 이후 중세 봉건제 단계
Ⅳ.통일신라를 중세시대의 시작으로 보는 입장과의 비교
Ⅴ.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고려후기 농장의 출현이다. 농장은 농민을 인적수탈 대상이 아닌 토지수탈 대상으로 바라보게 했으며, 중세의 장원과 비슷한 성격을 지녔다. 장원제는 토지를 지닌 영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방식 이었고, 농장 역시 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 방식이었다. 다만 농장은 장원보다 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독립적인 면이 작았다.
적장자상속으로 규제된 토지의 집단적 소유는 혈연적 관계에 얽매인 것이 아닌 분할상속에 입각하는 개별적 사유가 생겼다. 이로 인해 농민은 공동체적인 유대관계에 연연하는 노예가 아닌 농노로 성장 하고, 조선의 외거노비(外居奴婢) 노비는 소유주에 따라 공노비와 사노비로 크게 구분되는데, 이들은 다시 각각 소유주와 함께 사는 솔거노비(率居奴婢)와 그렇지 않은 외거노비로 나뉜다. 따라서 공노비로서의 외거노비와 사노비로서의 외거노비가 있었다. 외거노비는 주인과 멀리 떨어져 독립호를 이루면서 대체로 주인의 토지를 경작하거나 다른 사람의 것을 빌려 경작하고 1년에 1.5~2필 정도의 신공을 납부했으므로 경제적으로는 전호(佃戶)와 비슷했다. 이 들은 주인집에 함께 살면서 농사와 집안의 잡일을 혹사당하던 솔거노비보다는 사회경제적 처지가 나아 이들 중 일부는 토지와 가옥, 심지어 노비까지 소유했다.
가 탄생 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고대와 중세의 차이점은 농민수탈을 수취에 의존하는 것이 아닌 노동력 징발에 의존하는 것이다. 고려 때, 농민은 역을 담당하게 되면서 수취의 대상이 아닌 징발의 대상이 되었다. 농장의 등장으로 소작인-지주의 관계가 등장하였다. 이에 토지를 소유한 자는 경작할 대상이 필요하게 됨으로써, 수탈의 중점이 토지를 소유하기보다 토지를 경작 할 수 있는 인간의 노동력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농장의 지주들은 농민을 자신들의 일에 요역에 이용 할 수 있었으며, 이런 점은 국가에 예속됨과 동시에 독립적인 존재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기존의 시대구분 중, 한국사의 특수성과 서양식관점이 결합된 고려말기 중세론에 입각하여 바라본다. 중세의 시작은 농장의 등장이다. 농장은 대토지소유라는 점에서 장원과 비슷하지만 전시과를 바탕에 둔 권력층이 수조권을 매개로 해서 형성했다는 점은 한국사적 특수성이다. 이러한 점에서 장원은 왕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치권을 얻을 수 있었지만, 농장은 전시과라는 특성상 왕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때의 농장은 서양의 봉건제의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인 장원과 상당히 유사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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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덕, 『한국사의 시대구분에 관한 연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79
한국경제사학회 편저, 『한국사시대구분론』, 을유문화사,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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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07.02
  • 저작시기200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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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43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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