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회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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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회의 성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서론

2.본론
1)문벌귀족의 사회
2)귀족적 통치기구
[1]중앙통치체제 -①중서문하성
②상서성
③중추원과 삼사
④어사대
⑤도병마사와 식목도감
⑥기타기관
[2]지방통치체제 - *군현제 영역:①5도 양계 ②향리
*부곡제 영역:③향⦁소⦁부곡⦁장⦁처 ④촌
[3]통치체제의 특징 -①중앙정치체제 ②지방통치체제 ③군사제도
3)경제구조
[1]농업기술 - ①수전농업 ②한전농업
[2]양전제와 전품제
[3]공전⦁사전⦁민전의 개념
4)토지제도
①전시과-*개정전시과와 시정전시과와 비교하여 나타나는 특징.
②양반전
③군인전
④한인전
⑤공음전
5)사회구조
6)사상과 문화
[1]고려 전기의 유교 - ①중세초기의 유교 ②천명사상 ③민본사상 ④정치사회론
[2]고려 후기의 유교 - ①주자성리학의 수용 ②천명사상 ③민본사상 ④정치사회론
7)고려시대의 불교

3.결론

4.참고문헌

본문내용

다.
바로 이러한 한계성은 당시 선사상에 심취한 부류들의 은둔적이고 개별분산적인 성향과 일반 민들이 신봉하고 있던 정토신앙을 깊이 인식하지 못한 태도 등으로 대별할 수 있다.
13세기 초반의 신앙결사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경향의 불교계는 대내외적으로 대몽항전기를 거치고 무신정권이 붕괴되면서 원지배기로 접어들게 됨에 따라 대대적인 개편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개편의 결과 대체로 다음 두 가지 경향을 띠게 되었다. 하나는 원 지배기 라는 정치사회적 현실 속에 타협하고 온존하려는 경향, 다른 하나는 13세기 전후에 이룩한 신앙결사 계통을 계승하면서 보수적인 성격을 비판하는 경향으로 대별할 수 있다.
13세기 전반에 신앙결사에 의해 기존의 보수적인 불교계의 모순을 척결하고자 했던 시도는 무너지고, 불교계는 일반 민들의 신앙기반을 아우르지 못하는 단계로 후퇴하는 양상을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보수적인 교단 운영에 부응하여 각 사원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채 종교외적인 기능만을 극대화하는 온상으로 변모했다. 자정능력을 상실한 불교계 내부의 이러한 공백을 메우게 된 것이 결국 주자성리학이었다.
원지배기하에서 대표적인 교단세력은 가지산문이었다. 가지산문이 부각된 경위는 13세기 전반에 걸쳐 활약한 일연과 깊은 관련을 갖고 있었다. 일연은 정치적으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일단 몽고와 강화를 맺게 되는 1258~70년대의 과도기에 불교계의 중추적인 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는 1258년의 왕정복고에 참여한 주체세력에 의해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일연(1206~89년)은 1219년 설악산 진전사의 대웅장로의 제자가 됨으로써 가지산문에 입문하였는데 일연이 국존으로 책봉됨에 따라 부각된 가지산문은 원지배기에 보수세력의 지원에 의해 그 세력을 확장하였으며, 일시적으로 묘련사 계통과 교권 장악을 위해 서로 대립하기도 하였으나, 고려 말에는 태고보우나옹혜근 등이 출현할 정도로 불교계의 중심세력으로 존속되었다. 특히 고려 말에 보우가 중국으로부터 임제종의 정통을 계승한 것으로 자처하면서 한 때 불교계의 통합을 시도했던 기반도 이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원지배기의 가지산문을 중심한 불교계의 중추세력이 당시의 정치사회구조 속에서 대두한 보수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는 점은 고려사회가 해체되어가는 과정에서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고 있는 단면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이와 같이 불교의 사회적 기능이 축소되어감에 따라 신앙결사 단계에서 구축한 사회적 기반, 즉 소수의 문벌귀족으로부터 지방사회의 향리층독서층이 획득한 사상계의 주도권을 주자성리학이 대신하게 되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자성리학이 고려 말에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사회적사상적 기반은 이미 무신란 이후의 불교계에 의해서 그 토양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불교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단계로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성리학을 가치로 내세운 신진 사대부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마침내 불교는 사상계의 주도적인 위치에서 완전히 밀려나고 말았다. 이로써 최소한 여말선초에는 지배계층을 중심으로 한 사상적 전환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바탕으로 약 1세기 후에는 명실상부한 유교사회로의 전환을 이룩하게 되었던 것이다.
3.결론 -처음이자 마지막인 무신정권의 등장
무인정권은 고려 문벌귀족체제의 누적된 모순이 원인이 되어 성립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사회는 정치사회경제 모든 면에서 무인정권 이전의 사회와 그 양상이 크게 달랐다. 특히, 정치면에서는 문벌귀족사회를 이끌던 문신중심의 정치세력이 무너지고 무신들이 새로운 집권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무신들은 문신들의 탄압하고 문신의 지위뿐 아니라 문신의 교양과 학문까지도 부정했다. 따라서 무신집권기에 살아남은 문신은 권력과 타협한 문신이었고, 대부분의 문신은 심산이나 궁곡에 피신하고, 일부는 죽립고회에서와 같이 은둔하였다. 최씨정권이 성립되면서 문신들의 보호육성책도 나왔지만, 대부분의 문신들은 무신정권과의 타협 속에서 무인정권을 정당화하고 유지하는 논리의 제공자에 불과하였다. 무인정권에 참여하였던 대다수의 문신은 현실모순에 대한 인식과 그 대응책의 수립이라는 의식보다는 권력과 타협하여 무인정권의 유지에 기여하였을 뿐이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다른 시대와는 달리 최씨 무신정권이 등장하였다. 고려는 정치, 사회, 경제 모든 면에서 특별함만을 고집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농민과 천민의 난이 많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무신정권에 대한 항쟁과 신분제에 대한 신분고하의 분노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무신정권이 일어난 것은 잘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무신정권으로 인해서 지배층들이 피지배층에 대한 관리가 허술하여서 많은 난이 발생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신정권의 농민난이 70여 건이 발생하였다면은 그전에는 2건 밖에 발발하지 않았다. 이만큼 피지배층이 각성하였고 자신의 신분을 위해서 투쟁할 줄 아는 시대가 도래하였기 때문이다. 비록 모든 난들은 진압되었지만 사회 내의 분위기는 피지배층을 위한 시대로 바뀌게 되었고 민을 위한 정치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비록 이러한 것들이 미비하였지만은 다른 시대와는 다른 특별한 것만은 분명하였다.
나는 가끔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문신들이 집권하는 시대가 아닌 무신이 집권하는 시대는 비록 권력만을 쫓는 사회였으며, 정권을 못하는 사회였지만 그 이면에는 난을 할 수 있는 배경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 근간으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사에서 유일무이한 역사의 현장으로 기록되어 남겨지니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공통점 속에서의 특별함 많이 특별한 사회를 유지하고 이끌어 간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참고문헌★
1. 박기현, 손에 잡히는 고려 이야기, 늘푸른 소나무, 2000년
2. 한국역사연구회, 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도서출판 청년사, 1997년
3. 한영우, 다시 찾는 우리 역사, 경세원, 2004년
4. 이기백, 한글판,한국사신론, 일조각, 2002년
5. 한국사 편집위원회,한국사5, 한길사, 1994년
6. 한국사 편집위원회, 《한국사6》, 한길사,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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