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제 1절 고려 왕조의 발전
1. 체제 안정 발전기
< 훈요십조>
2. 무신 정권기
3. 원의 간섭과 고려의 쇠망
제 2절. 행정 환경
1. 정치
2. 경제
3. 사회 ․ 문화
1) 신분 계층
2) 토성 분정 : 본관제
제 3절. 중앙 행정 기관
1. 3省6部
1) 3성 : 중서문하성, 상서성
2) 6부
3) 중추원
4) 삼사, 어사대(→사헌부), 도병마사, 식목도감
5) 그 밖의 기관들
제 4절. 지방 행정 제도
제 4 절. 숭불정책과 행정
교종과 선종의 대립과 조정
제 5절. 호족과 문벌귀족
호족
문벌귀족
1. 체제 안정 발전기
< 훈요십조>
2. 무신 정권기
3. 원의 간섭과 고려의 쇠망
제 2절. 행정 환경
1. 정치
2. 경제
3. 사회 ․ 문화
1) 신분 계층
2) 토성 분정 : 본관제
제 3절. 중앙 행정 기관
1. 3省6部
1) 3성 : 중서문하성, 상서성
2) 6부
3) 중추원
4) 삼사, 어사대(→사헌부), 도병마사, 식목도감
5) 그 밖의 기관들
제 4절. 지방 행정 제도
제 4 절. 숭불정책과 행정
교종과 선종의 대립과 조정
제 5절. 호족과 문벌귀족
호족
문벌귀족
본문내용
판을 준비하여 나갔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지방 행정 편제에 대한 변화를 통해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으며, 한편으로는 호족에 대한 신분적 재편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먼저 행정편제의 변화는 주(州) 부(府) 군(郡) 현(縣)과 같은 행정 구역의 설치를 통하여 이루어졌다. 태조 13년(930) 고창(古昌, 안동)에서 견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왕건은 지방 통치를 위하여 군현을 설치하였다. 물론 모든 지역에 일률적으로 군현을 설치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영역으로 흡수된 지역을 통합하거나 흡수하여 군현이나 주(州)로 편제하여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후삼국이 통일되면서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치를 위하여 체제를 대폭 개편하였다. 태조 23년(940) 주 부 군 현의 명칭을 개정하였던 조치가 이루어짐으로써 지방 통치조직에 대한 전면적 개편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 때의 조치는 지역 이름의 변화만이 아니라 고려의 통치체제를 지방에 확산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이 때 지방관이 제대로 파견된 것은 아니지만 주현(主縣)과 속현(屬縣)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지방의 행정체계가 정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현을 통하여 중앙의 지배가 이루어졌는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몇몇 주현을 아우르는 계수관(界首官)에 의해 중앙의 지방 지배가 이루어지는 체제가 이루어졌다.
문벌귀족
-문벌귀족은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새로운 지배 세력이 형성되어 가게 되는데,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었습니다. 특히, 후자는 성종의 숭유 정책에 힘입어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지배세력은 성종이 후 점차 그 기반이 다져져 하나의 사회 계층으로 정착되어 갑니다.
귀족사회의 전성기인 문종이후 의종대에 이르는 귀족정치의 전개는 점차 그들 내부에 모순이 축적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문벌이란 것이 정치적인 출세나 경제적인 부를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있던 고려사회에서 정권과 경제력을 위한 귀족 상호간의 항쟁이 야기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리하여 그러한 항쟁은 수차레에 걸친 반란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반란이 귀족문화의 극성기라 할 수있는 인종·의종대에 연달아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었다.
이자겸의 난은 왕권의 약화와 귀족세력의 강대가 빚어낸 전형적인 사건이다. 문종때부터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왔던 인주이씨(仁州 李氏)는 이자겸이 예종에 이어서 인종과도 중복되는 인척관계를 맺더니 모든 권세를 독차지하였다. 그의 일족과일당은 모두 영달하였고 그와 상치되는 자는 왕족이나 공신을 가리지 않고 유배 혹은 주살되어 모두 쫓겨 났다. 이에 교만하여진 이자겸은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이라는 참설을 믿어 척준경(拓俊京)과 손을 잡고 그를 군사적 배경으로 하여 왕위찬탈의 야심을 품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仁宗은 측근의 신하와 꾀하여 그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척준경의 민첩한 군사행동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인종4년, 1126). 그러나 더욱 횡포해진 이자겸은 반목으로 돌아선 척준경에 의해서 도리어 축출되니 하늘을 찌를듯이 기세가 당당하던 인주 이씨세력은 몰락하였다. 이는 고려전기의 귀족사회가 붕괴되는 발단이 되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은 불타고 개경은 황폐해져 민심이 동요하였다. 이때 고려는 밖으로 여진의 금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하게 되어 대외문제에 있어서도 시련을 맞고 있었다. 이러한 내외의 정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개경의 문벌귀족들을 넘어뜨리고 새로운 혁신정치를 도모하려 한 것이 묘청(妙淸) ·정지상(鄭知常)·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세력이었다. 이들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하였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하므로 서경에 천도하면 금국은 물론 천하를 아우를 수 있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국가중흥의 실을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 고려사회를 풍미하던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사대적인 개경의 문벌귀족정치를 벗어나 서경에서 자주적인 혁신정치를 실행해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묘청의 천도운동은 오랜 문벌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려는 인종에겐 받아들여졌지만 김부식(金富軾)을 대표로 하는 개경파 문벅귀족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좌절당하고 말았다. 이에 묘청은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遺忠義軍)이라 하여 관군과 대립하였으나 대치 1년만에 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후삼국이 통일되면서 중앙정부는 지방에 대한 통치를 위하여 체제를 대폭 개편하였다. 태조 23년(940) 주 부 군 현의 명칭을 개정하였던 조치가 이루어짐으로써 지방 통치조직에 대한 전면적 개편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 때의 조치는 지역 이름의 변화만이 아니라 고려의 통치체제를 지방에 확산하려는 것이었다. 비록 이 때 지방관이 제대로 파견된 것은 아니지만 주현(主縣)과 속현(屬縣)과의 관계가 형성되고, 지방의 행정체계가 정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주현을 통하여 중앙의 지배가 이루어졌는가는 확실하지 않지만, 몇몇 주현을 아우르는 계수관(界首官)에 의해 중앙의 지방 지배가 이루어지는 체제가 이루어졌다.
문벌귀족
-문벌귀족은 중앙 집권적인 국가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새로운 지배 세력이 형성되어 가게 되는데, 이들은 지방 호족 출신으로 중앙 관료가 된 계열과 신라 6두품 계통의 유학자들이었습니다. 특히, 후자는 성종의 숭유 정책에 힘입어 정치의 주도 세력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지배세력은 성종이 후 점차 그 기반이 다져져 하나의 사회 계층으로 정착되어 갑니다.
귀족사회의 전성기인 문종이후 의종대에 이르는 귀족정치의 전개는 점차 그들 내부에 모순이 축적되어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문벌이란 것이 정치적인 출세나 경제적인 부를 누릴 수 있는 토대가 되어 있던 고려사회에서 정권과 경제력을 위한 귀족 상호간의 항쟁이 야기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리하여 그러한 항쟁은 수차레에 걸친 반란의 형태를 띠고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반란이 귀족문화의 극성기라 할 수있는 인종·의종대에 연달아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었다.
이자겸의 난은 왕권의 약화와 귀족세력의 강대가 빚어낸 전형적인 사건이다. 문종때부터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왔던 인주이씨(仁州 李氏)는 이자겸이 예종에 이어서 인종과도 중복되는 인척관계를 맺더니 모든 권세를 독차지하였다. 그의 일족과일당은 모두 영달하였고 그와 상치되는 자는 왕족이나 공신을 가리지 않고 유배 혹은 주살되어 모두 쫓겨 났다. 이에 교만하여진 이자겸은 '십팔자위왕(十八子爲王)'이라는 참설을 믿어 척준경(拓俊京)과 손을 잡고 그를 군사적 배경으로 하여 왕위찬탈의 야심을 품기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仁宗은 측근의 신하와 꾀하여 그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척준경의 민첩한 군사행동으로 인하여 실패하였다(인종4년, 1126). 그러나 더욱 횡포해진 이자겸은 반목으로 돌아선 척준경에 의해서 도리어 축출되니 하늘을 찌를듯이 기세가 당당하던 인주 이씨세력은 몰락하였다. 이는 고려전기의 귀족사회가 붕괴되는 발단이 되었다.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은 불타고 개경은 황폐해져 민심이 동요하였다. 이때 고려는 밖으로 여진의 금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하게 되어 대외문제에 있어서도 시련을 맞고 있었다. 이러한 내외의 정세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개경의 문벌귀족들을 넘어뜨리고 새로운 혁신정치를 도모하려 한 것이 묘청(妙淸) ·정지상(鄭知常)·백수한(白壽翰) 등 서경세력이었다. 이들은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하였고 서경의 지덕은 왕성하므로 서경에 천도하면 금국은 물론 천하를 아우를 수 있고 칭제건원(稱帝建元)하여 국가중흥의 실을 거둘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당시 고려사회를 풍미하던 풍수지리설을 이용하여 사대적인 개경의 문벌귀족정치를 벗어나 서경에서 자주적인 혁신정치를 실행해 보려는 의도에서였다. 묘청의 천도운동은 오랜 문벌정치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려는 인종에겐 받아들여졌지만 김부식(金富軾)을 대표로 하는 개경파 문벅귀족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쳐 좌절당하고 말았다. 이에 묘청은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켜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하고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遺忠義軍)이라 하여 관군과 대립하였으나 대치 1년만에 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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