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Ⅰ. 개요
Ⅱ. 경주 포석정과 문헌자료
Ⅲ. 경주 포석정과 유상곡수
Ⅳ. 경주 포석정과 어무상심무
Ⅴ. 경주 포석정의 연회장 설
참고문헌
Ⅱ. 경주 포석정과 문헌자료
Ⅲ. 경주 포석정과 유상곡수
Ⅳ. 경주 포석정과 어무상심무
Ⅴ. 경주 포석정의 연회장 설
참고문헌
본문내용
인해 군수직을 얻지 못한 열기가 기원사의 중순경의 도움으로 군수직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실제사에 대한 아래와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
실제사의 승 영여는 그 씨족이 자세치 아니하나 덕과 행이 다 높았다. 경덕왕이 그를 맞아 공양코자 하여 사람을 보내어 불렀다. 영여가 궐내에 들어와 재를 마치고 돌아갈 때 왕이 사람을 시켜 절에 배송케 하였더니 절문에 들어서자 곧 숨어 버리어 그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사자가 와서 아뢰니 왕이 괴이히 여겨 국사로 추봉하였으나 후에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지금도 그 절을 국사방이라고 칭한다.
이 기록들을 참조해 볼 때 우리는 기원사와 실제사가 비교적 오래 전에 창건된 절이라는 점과 동시에 비교적 비중이 있었던 절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절 사이에 포석정이 있었다면 포석정의 행사는 연회만을 목적으로 한 행사였다기보다는 불교적인 행사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포석정이 연회 장소가 아니었다면 그 당시 왕과 신하들이 연회 장소로 주로 어디를 이용하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사』에 문무왕은 궁내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온갖 화초를 심고 진기한 동물들을 길렀고,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바로 안압지와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 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임해전에서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가졌다는 아래와 같은 기사들을 역시 『삼국사유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① 효소왕 6년(697년) 9월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잔치하였다.
② 혜공왕 5년(769년) 봄 3월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연회하였다.
③ 헌안왕 4년(860년) 가을 9월 왕은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잔치하고 왕족인 응염과 더불어 삼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④ 헌강왕 7년(881년) 봄 3월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잔치하여 술이 얼큰하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좌우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했다.
⑤ 경순왕 5년(931년) 2월 고려 태조가 50여 기를 거느리고 서울 가까이에 와서 배알할 것을 청하자 왕은 백관으로 더불어 교외로 나가 그를 맞고 들어와 극진한 마음으로 대접하고 임해전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위의 기록들을 통해서 문무왕이 안압지와 임해전을 만든 뒤 신라의 왕들은 연회장소로 주로 임해전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포석정이 왕과 신하들이 연회만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소라는 점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선문(1996) - 우리건축을 찾아서 1, 발언
김동저(2001) - 한국 건축의 역사, 기문당
박언곤(1999) - 한국의 정자, 대원사
신영훈, 사진/김대벽 - 목수 신영훈과 함께 하는 우리문화 우리역사 답사기, 대한교과서
이종욱(2000) -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서울 : 김영사
정재훈(1996) - 한국 전통의 원, 도서출판조경
한국고대사학회(1997) - 한국고대사연구, 서울 : 서경문화사
실제사의 승 영여는 그 씨족이 자세치 아니하나 덕과 행이 다 높았다. 경덕왕이 그를 맞아 공양코자 하여 사람을 보내어 불렀다. 영여가 궐내에 들어와 재를 마치고 돌아갈 때 왕이 사람을 시켜 절에 배송케 하였더니 절문에 들어서자 곧 숨어 버리어 그 소재를 알지 못하였다. 사자가 와서 아뢰니 왕이 괴이히 여겨 국사로 추봉하였으나 후에 다시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하였다. 지금도 그 절을 국사방이라고 칭한다.
이 기록들을 참조해 볼 때 우리는 기원사와 실제사가 비교적 오래 전에 창건된 절이라는 점과 동시에 비교적 비중이 있었던 절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두 절 사이에 포석정이 있었다면 포석정의 행사는 연회만을 목적으로 한 행사였다기보다는 불교적인 행사와 관련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또한 여기에서 우리는 포석정이 연회 장소가 아니었다면 그 당시 왕과 신하들이 연회 장소로 주로 어디를 이용하였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삼국사사』에 문무왕은 궁내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온갖 화초를 심고 진기한 동물들을 길렀고, 지극히 웅장하고 화려한 궁궐을 중수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바로 안압지와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 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임해전에서 왕과 신하들이 연회를 가졌다는 아래와 같은 기사들을 역시 『삼국사유사』에서 찾아 볼 수 있다.
① 효소왕 6년(697년) 9월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잔치하였다.
② 혜공왕 5년(769년) 봄 3월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연회하였다.
③ 헌안왕 4년(860년) 가을 9월 왕은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잔치하고 왕족인 응염과 더불어 삼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④ 헌강왕 7년(881년) 봄 3월 임해전에서 여러 신하와 잔치하여 술이 얼큰하자 왕은 거문고를 타고 좌우 신하들은 각각 가사를 지어 올리며 매우 즐겁게 놀고 파했다.
⑤ 경순왕 5년(931년) 2월 고려 태조가 50여 기를 거느리고 서울 가까이에 와서 배알할 것을 청하자 왕은 백관으로 더불어 교외로 나가 그를 맞고 들어와 극진한 마음으로 대접하고 임해전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위의 기록들을 통해서 문무왕이 안압지와 임해전을 만든 뒤 신라의 왕들은 연회장소로 주로 임해전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포석정이 왕과 신하들이 연회만을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장소라는 점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김선문(1996) - 우리건축을 찾아서 1, 발언
김동저(2001) - 한국 건축의 역사, 기문당
박언곤(1999) - 한국의 정자, 대원사
신영훈, 사진/김대벽 - 목수 신영훈과 함께 하는 우리문화 우리역사 답사기, 대한교과서
이종욱(2000) - 화랑세기로 본 신라인 이야기, 서울 : 김영사
정재훈(1996) - 한국 전통의 원, 도서출판조경
한국고대사학회(1997) - 한국고대사연구, 서울 : 서경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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