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지배하는 유럽의 구 경제 : 암스테르담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도시가 지배하는 유럽의 구 경제 : 암스테르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아시아에서의 성공, 아메리카에서의 실패
(1) 투쟁과 성공의 시간
(2)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흥성과 쇠망
(3) 왜 18세기에 실패를 겪었는가?
(4) 신세계에서의 실패 : 네덜란드의 성공과 한계

2. 패권과 자본주의
(1) 암스테르담에서는 창고가 모든 것을 좌우한다.
(2) 상품과 크레딧
(3) 위탁교역
(4) 인수교역
(5) 대부의 유행 또는 자본의 쇠락
(6) 다른 조망 : 암스테르담으로부터의 떨어진 곳
(7) 발틱 해 연안지역
(8) 프랑스 대 네덜란드 : 불평등한 싸움
(9) 영국과 네덜란드
(10) 비유럽 : 말레이 군도
(11) 일반화가 가능한가?

3. 암스테르담의 쇠퇴
(1) 위기들 : 1763년, 1772-1773년, 1780-1783년
(2) 바타비아 혁명

본문내용

. 암스테르담 거래소는 마비됐다. 해결책은 네덜란드로의 현찰 유입이다. 이로 해서 위기가 일단 지나가자 큰 어려움 없이 부활했다.
2) 두번째 위기-1773년 : 클리퍼드의 파산(1772년 12월 28일)을 뒤이어 여러 회사들이 파산하면서 위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의 것보다 더 심각한 위기였다. 결정적인 사실은 최초의 충격이 암스테르담이 아닌 런던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이 파국은 당시 인도에서, 그 중에서도 특히 벵골 지역에서 곤란을 겪고 있던 영국 동인도 회사의 주식 가격이 폭락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런던에서 시작된 위기는 영국은행의 개입을 가져왔다. 이 은행은 의심스러운 어음의 할인을 거부했고 곧 모든 어음의 할인을 거부했다.
암스테르담은 사정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비율로 따진다면 아직까지도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세계-경제 내에서의 주도권이다. 다시 1773년 2월에 제노바에서 엄청난 파산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오면 더 이상 암스테르담은 중심지나 진앙지가 아니다. 중심지는 이미 런던으로 넘어갔다. 즉 세계-경제의 중앙에는 하나의 도시가 자리잡고 있어서 이것이 규칙적으로 이 체제의 지진을 불러일으키고 또 그로부터 가장 먼저 회복된다는 규칙이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3) 세 번째 위기-1780년 : 80년대의 위기가 터졌을 때, 암스테르담의 주도권은 이미 작동하지 않았다. 이 위기가 앞의 위기들과 다른 것은 긴 기간, 유별나게 네덜란드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 그리고 이 위기의 움직임이 제 4차 영란 전쟁과 결부되어 있다는 점뿐만이 아니라 이 위기가 더 광범한 위기이자 다른 유형에 속하는 경제적 위기인 인터사이클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네덜란드는 크레딧만이 아니라 경제 전반을 건드리는 장기적 위기 속에서 싸워야만 했다. 이에 네덜란드의 효율적이었던 정부는 무기력하고 내부적으로는 분열되었다. 긴급무장은 사문서가 되고, 병기창의 근대화는 불가능했다. 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마련된 새로운 조세들은 전반적인 불만을 야기했다. 거래소도 침울했다.
(2) 바타비아 혁명
급기야 네덜란드는 국내에서 갑자기 정치적, 사회적 혁명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것은 프랑스를 지지하고 “자유”를 주창하는 “애국당”의 혁명이었다. 유럽 대륙 최초의 혁명이며 프랑스 혁명의 선구로서, 전체적으로 보면 이 혁명은 복잡하고 난폭한 사건들의 연속, 논쟁과 설전, 심한 증오, 무장충돌의 연속이었다. 또한 부르주아 혁명이면서 동시에 계급투쟁이었다. 애국당은 무엇보다도 소부르주아지였다. 애국당의 테러 행위에 대응하여 전국에 걸쳐 스타트하우더 편인 오라녜 파의 폭력행위가 등장했다. 소문, 봉기, 그리고 그 뒤의 진압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리고는 무질서가 만연했다. 그러나 이것은 혁명적인 소요는 아무리 강력한 것이었다고 해도 네덜란드를 서로 적대적인 두 편으로 가라놓은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했다. 네덜란드가 당시 처해있는 취약한 상황에서는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고, 네덜란드 연방공화국은 영국과 프랑스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여 있어서 두 강대국의 힘 겨루기 대회의 상품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처음에는 프랑스가 이기는 것처럼 보였다.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1785년 11월 10일에 퐁텐블로에서 동맹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그것은 애국파에게든 베르사유 정부에게든 헛된 승리에 불과했다. 영국은 현지에 나가 있는 탁월한 능력의 대사인 제이스 해리스를 통해서 스타트하우더와 그 추종자들을 이용하는 카드를 썼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보조금을 배분해주었다. 결국 훗날 영국의 보조금은 프로이센의 개입을 가져왔는데, 그 이전에 군대를 파견했던 프랑스는 여기에 대응하지 못했다. 일단 스타트하우더 세력이 복귀하자 폭력적이고 체계적인 반동이 그 뒤를 이어서 일어났다. 국외, 국내적으로 폭력적인 반발이 멈추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프로이센 군대가 정복지로 진주해왔다. 전시의 프로이센 군대의 체제가 된 것이다. 이 체제로 인해 네덜란드는 완전히 피폐해졌다. 프로이센 군대는 1788년 5월에 떠났다. 그러나 이때쯤이면 스타트하우더의 반동은 완전히 제자리를 잡아서 자기 길을 계속 가고 있었다.
그러나 혁명은 이웃 지역인 브라방 곧 브뤼셀에서 계속 타오르고 있었다. 이곳은 암스테르담의 모습을 본떠서 활발한 화폐시장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 정부의 끝없는 필요와 욕심에 시달리고 있었다.
  • 가격1,500
  • 페이지수9페이지
  • 등록일2009.10.15
  • 저작시기2009.10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56836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