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고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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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故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고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김대중

●김대중의 생애

●평가

본문내용

국내외적으로 헌신한 분"이라면서 "영국 정부를 대신해 한국 국민들에게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아소 다로 일본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의 업적에 깊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밝히고 "김 전 대통령과 일본 정계 지도자들이 합심해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 등 21세기를 향한 새로운 한·일 관계를 구축하는 데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평가했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은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을 "중국 국민의 가까운 친구"라면서 "중국 정부와 국민은 그가 한·중 관계 개선을 위해 쏟았던 노력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 앞으로 조문을 보내 고인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명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한국 민주화와 인권, 동북아 평화와 안전을 위한 김 전 대통령의 정치적 업적은 잊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며 "독일은 좋은 친구를 잃었다"고 애석해 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공식 성명에서 "민주화와 인권의 용감한 투사인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한다"고 말했다. 또한 "김 전 대통령은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서 "조국에 대한 헌신과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칠 줄 모르는 노력, 자유를 위한 개인적 희생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심각한 경제위기를 넘어서 한국을 움직인 용감하고 비전에 찬 지도자였다.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의 길을 놓았고, 국제사회의 인권을 지켰으며, 따라서 노벨평화상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었다. 햇볕정책은 한국전쟁 이후 그 어느 때보다 한반도에 지속적인 평화를 주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남북 정상이 만난 6.15 공동선언을 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측에서도 서해직항로를 이용한 특별기편으로 조문단을 파견하였기도 하였다.
일본 도쿄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제가 개최되었다. '일본 민간 김대중 추모위원회'는 오는 11월 13일 오후 5시 도쿄 아사히신문 아사히홀에서 김대중 추모제를 개최되었다. 일본 유력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민간 김대중 추모위원회’가 마련한 자리다. 추모위에는 도이 다카코 전 중의원 의장,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 의장, 와다 하루끼 도쿄대(東京大) 명예교수, 이또 나리히꼬 주오대(中央大)명예교수, 오카모토 세계 편집장 등이 참여하고 있다. 이또 나리히꼬 교수는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 당시 진상규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1980년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에 대한 구명활동에 나서는 등 인연이 깊다. 한국측에선 유족대표로 이희호 여사와 한승헌 변호사, 박지원 의원이 참석한다. 민주당에선 정세균 대표와 원혜영 의원 등 10여명의 의원이 함께할 예정이다. 한편, 12일부터 4일간 일정으로 13일 오후 2시부터 한일 민주당의원 30여명이 모여 가칭 ‘한일 민주당포럼’을 결성한다. 이들은 포럼을 통해 새로운 한일관계를 모색해나간다는 구상이다. 또 오사카 민단, 재일 기업인 등 재일동포들과 만날 계획이다
13. 장례
그의 장례는 국장으로 정해졌으며, 영결식은 23일 여의도 국회광장에서 거행되었다. 장례를 주관하는 장의위원장은 한승수 국무총리가 단독으로 맡았다. 이상은 사망 이튿날인 2009년 8월 19일 오후 8시에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결정되었으며 유족측과 이명박 정부는 서로 합의하여 국장으로 치루되 경제위기를 고려해 6일장으로 결정하였다.
장지는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되었다. 당초 국립대전현충원, 국립 518민주묘지, 고향인 신안군 하의도, 용인의 가족묘 등이 거론되었는데, 유족들의 뜻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으로 결정된 것이다.
2009년 10월 5일에는 그의 비석이 세워졌는데 충남 보령의 오석(烏石)으로 제작된 묘비에는 전면과 측, 뒷면에 각각 `제15대 대통령 김대중의 묘'란 문구와 고인의 주요 공적, 경력, 가족사항 등이 기록돼 있다
●평가
1. 긍정적 평가
노무현은 1994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서 김대중에 대해 정치 지도자가 갖춰야 할 '권력 장악 능력', '살림 살이 솜씨', '역사의식'을 두루 갖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또 그는 김대중은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고, 발전을 거듭하며, 정말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평가와 함께 김구 선생과 필적할만한 '지도자'로써 존경한다는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
또 김대중은 군사 정권에 대항하며 납치당하기도 하고 사형 선고를 받으면서도 신민당과 평민당 등의 야당의 지도자로서 권력에 대한 끊임없는 견제를 통해 민주화의 결실을 이뤄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
대통령직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재정·금융 긴축과 대외개방, 금융 및 기업의 구조조정 등의 경제개혁으로 1997년 11월부터 시작된 IMF(국제통화기금) 관리체제의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고, 흡수통일을 파기하고 햇볕정책이라는 이름의 대북포용정책을 견지하여, 분단이 고착화되고 군사적대치관계에 있던 기존의 남북관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토대로 2000년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해 한국의 위신을 높였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해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인권을 증진하였다는 평가가 있다.
2009년 9월 23일 미국 시사주간 뉴스위크에서 조국의 정치,경제,사회적 변혁을 이끈 11인 지도자 '트랜스포머'로 김대중을 선정했다. 그는 계속된 암살 위협에도 불구, 평생 민주화에 헌신한 인물로 소개됐다. 1997년 대통령에 당선돼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여야간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냈으며, 재임 때 아시아 금융위기의 나락에서 한국을 구출했다고 덧붙였다.'햇볕정책'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기여해 200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업적도 높이 평가했다
2. 부정적 평가
대북 정책에 대한 비판이 있는데, 일부 보수언론과 극우 보수단체에서는 햇볕정책에 의해 이루어진 대북 원조는 1998년 대포동 1호 미사일 실험, 1999년 제1연평해전, 2002년 제2연평해전 발발로 인해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대북 송금 사건에 대해서도 정상 회담의 대가로 북측에 현금이 건네진 것으로 햇볕정책에 투명성이 부족했다는 주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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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09.12.20
  • 저작시기20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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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568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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