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군사제도의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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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려 군사제도의 성격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序論
2. 高麗時代 軍事制度
(1) 中央軍 : 2軍 6衛
(2) 地方軍
㉮ 州縣軍 ㉯ 州鎭軍
3. 高麗時代 軍事制度의 性格(中央軍의 人的構成에 대한 諸說)
(1) 府兵制說
㉮ 府兵制說이란?
㉯ 府兵制說의 問題點
(2) 軍班氏族制說
㉮ 軍班氏族制說이란?
㉯ 軍班氏族制說의 問題點
(3) 京·外軍 混成制說
4. 結論

본문내용

필요가 있다.
≪高麗史≫ 兵志를 보면 병력 수를 병종별로 구별하여 표시할 때 언제나 보승군 항을 먼저 쓰고 그 다음에 정용군 항을 썼다. 이 같은 기재방식은 양자간의 제도적 서열을 표시하며 보승군이 정용군에 비하여 상위의 군사들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高麗史≫ 兵志 州縣軍條에 보고된 경기 및 남도지방의 병종별 군인 수효를 보면 보승군보다는 정용군이 두 배 가량 더 많았다. 따라서 적어도 보승군과 정용군이 각기 보군과 마군의 별칭이 아니었음은 명백하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군인전 지급대상자로서의 마군 및 보군은 보승군 및 정용군과는 서로 다른 범주의 군인들이었음을 말해준다.
보승군과 정용군이 이처럼 전시과 규정상의 보군과 마군이 아닌 지방의 농민군들이었다면 보승군과 정용군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보승군은 향촌사회에서 비교적 그 가세가 부강한 농민들 중에서 선발된 군인들이었던 반면, 정용군은 비록 신분이나 가세는 보잘 것 없지만 개인적 용맹성 대문에 중앙군으로 선발된 군인이라는 점으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고려 전기 중앙군(2군 6위)의 군역제도에 대하여 府兵制說, 軍班氏族制說, 그리고 京·外軍 混成制說 등 세 가지 주요 立論들을 살펴보았다. 총 4만 5천명 편제의 2군 6위의 군사들이 어떤 부류의 군인들로 충원되어 있었으며 어떤 보수제도 하에서 운용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이 세 가지 입론은 각기 주장이 달랐다. 마지막에 살펴본 경·외군 혼성제설은 부병제설과 군반씨족제설을 비판적으로 종합하면서도 몇 가지 구체적인 증거들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 가설은 다른 두 가설에 비해 보다 많은 관련 증거들을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경·외군 혼성제설에 의한 사실해석이 부병제설이나 군반씨족제설에 비해 더 타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종래에는 일반적으로 군반씨족제설에 의해 고려 전기의 군사조직과 군역제도가 설명되었다. 그리하여 2軍 6衛의 中央軍은 곧 京軍으로 인식되었고, 주현군은 경기 및 남도지방의 보승군과 정용군을 주축으로 한 별도의 지방군 조직인 것으로 해석되어 왔었다. 그러나 경·외군 혼성제설에 따르면, 중앙군이 居京 군인 곧 경군만으로 편성되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경군은 중앙군의 적은 일부였으며 나머지 대다수는 경기 및 남도지방의 농민군 곧 보승군과 정용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2군 6위의 군사조직을 경군조직이라고 지칭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주현군도 하나의 지방군 조직으로서 이해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고려 전기 중앙군이 경군과 외군으로 편성되어 있었다는 가설 하에서는 경군과 주현군에 대한 해석이 이전의 그것들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지방군 조직으로서 주현군에 대한 부정은 고려 전기 군사조직에 대한 전반적 구도를 크게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즉, 경·외군 혼성제설의 관점에서 주현군 자체를 구체적으로 다시 검토하고 해석하는 일이 요구된다. 그런 의미에서 경·외군 혼성제설은 하나의 새로운 결론을 제시하는 동시에 새로운 문제를 제시하는 가설이다.
4. 結論
지금까지 高麗時代 軍事制度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고려의 군사조직은 中央軍과 地方軍의 이원적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중앙군은 왕의 친위군인 2軍(응양군·용호군)과 수도경비와 국경의 방어 임무를 가지는 6衛(좌우위·신호위·흥위위·금오위·천우위·감문위)로 편성하고, 상장군·대장군 등의 武官을 두어 지휘하게 하였다. 응양군은 천명, 용호군은 2천명의 군인으로 조직되었고, 군·위 바로 밑의 단위부대는 영이었는데 2군 6위에는 모두 45개의 領이 딸려 있었다. 영은 천명의 군인으로 조직된 부대였으므로 고려의 경군은 모두 4만 5천명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그것은 규정상 일뿐 실제로는 때에 따라서 수가 가감했다.
地方에는 州縣軍과 州鎭軍을 두었는데, 주현군은 대체로 자기 토지를 경작하면서 지방의 방위와 노역에 동원되었고, 일정한 수의 보승·정용·일품군이 정해져 있었다. 이들 주현군의 군인은 일정한 군영에 주둔하지 않은 예비군적인 존재로 서울이나 양계로 분번입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양계는 국경 지대였으므로 남쪽의 주현군과는 달리 주진군으로 편성되었다. 양계에 배치된 주진군은 초군·좌군·우군으로 구성된 국방의 주역을 담당한 상비군으로서 그 최고 지휘관을 都領이라는 그 지역의 토호출신으로 임명되었다. 이들 주진군은 양계의 토착인을 중심으로 편성되고 일부는 5도에서 교대로 방수하러 간 군인(州鎭入居軍人)이었는데, 주·진의 성내에 주둔하면서 항상 전투태세를 갖춘 상비적인 전투부대였던 것이다.
또 중앙군의 인적 구성에 대한 성격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모두 세 가지 제설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이것이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府兵制說은 中央軍을 군역의 대가로 租稅를 면제받게 된 이들이 모두 農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반해 軍班氏族制說에서는 중앙군 전부가 개경에 거주하고 專業的이고 世襲的인 軍人들로 편성되어 있으며 전시과 제도상의 군인전은 이들에게 주어진 收組地였던 것으로 이해하고있다.
하지만 이 두 설 사이의 대립이 팽팽하게 진행되는 가운데, 모순과 비판이 나타나면서 최근에 이 둘을 절충시킨 京·外軍 混成制說이 대두되고 있다는 사실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경·외 혼성제설에서는 중앙군은 크게 개경에 거주하는 專業的 군인층(京軍)과 지방에서 番上入役하는 農民軍층(外軍) 등 두 종류의 군인층으로 편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 알아본 것을 통해 고려의 군제성격을 딱 하나로 규정 짓기는 힘들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각의 설에 대한 타당한 논거가 있는 반면에 모순점도 발견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명확한 사료와 탄탄한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한 논의와 논쟁들이 계속 되어가다 보면 언젠가 고려시대 군사제도에 대한 정확한 사실이 드러날 수 있다고 본다.
※ 參考文獻 ※
張東翼,「高麗前期의 選軍」,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鄭景鉉 외, 「軍事組織」, 『韓國史』13, 國史編纂委員會, 1993
韓國中世史學會, 「軍事制度」,『고려시대사강의』, 늘함께, 1997
邊太燮, 『韓國史通論』, 三英社, 2001
  • 가격2,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09.12.29
  • 저작시기2004.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70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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