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교단 중 침례교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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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침례교의 특징
1. 침례교의 특징
2. 교리적 측면
3. 조직적 측면
4. 대사회적 측면

Ⅱ. 침례교의 기원

Ⅲ. 침례교의 세계사적 전개

Ⅳ. 일제하의 한국 침례교

Ⅴ. 광복 후의 한국 침례교

Ⅵ. 의 견

본문내용

도 종전의 파송제에서 청빙제로 바꾸었다. 그러자 구체제를 옹호하는 일부 교인들을 중심으로 10여 개의 교회가 대한기독교라는 교명을 걸고 분리해 나갔다. 이후 대한기독교는 대한기독교침례회라는 교명으로 현재까지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동아기독교는 1949년 제39회 총회를 충남 강경에서 개최하고 교명을 대한기독교침례회로 변경하였다. 그리고 이 총회를 계기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미국남침례회와 손을 잡고 많은 변모를 겪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당시 미남침례회 외국선교부 산하에는 105명의 선교사들이 중국, 일본 및 필리핀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1945년 미남침례회 외국선교부는 중국에서 백만 불에 상당하는 선교회의 재산 손실과 유럽에서는 50만불 상당의 재산 손실을 입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남침례회는 광복 이전 중국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대한기독교침례회를 통해서 그들의 선교사업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광복 후 최초로 우리나라에 들어 온 미남침례회 선교사는 광복 이전 중국에서 활동하였던 에버내티(John Arch Abernathy, 1896-1973)였다. 그는 1950년에 내한하여 폐허가 된 한국 침례교를 위해 많은 구호사업을 전개하였다.
1952년 충남 칠산에서 개최된 42회 총회에서 대한기독교침례회는 다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으로 교명을 바꾸었다. 문제는 미남침례회의 선교 지원을 받으면서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은 서서히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 측은 미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선교자금을 이용하여 교세를 확장시키고자 타교파의 목회자들을 대거 영입하였다. 이 때 타교파의 목회자들은 침례교의 신앙을 철저하게 이해해서라기보다 미남침례회의 풍부한 선교자금을 이용하여 보다 자유로운 목회활동을 하기 위해서 침례교를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한기독교 침례회 연맹은 숫적으로는 교세를 확장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하였지만 선교자금을 관장하는 선교사를 중심으로 소위 진보파(혁신파)와 보수파(노장파)로 나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되었다. 진보파는 영입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한 친선교사 계통이었고, 보수파는 펜윅의 지도 아래 일제하에서부터 활동하였던 반선교사 계통이었다.
결국 이들 사이의 내분이 표면화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은 두 개의 총회로 분열되고 말았다. 먼저 1959년 4월 25일 선교회의 지원을 받는 몇몇 교단의 지도자들과 전입 교역자들을 중심으로 대전의 대흥동침례교회에서 소위 대전총회가 열리고 그 곳에서 기독교한국침례회라는 교단이 출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25일 그 때까지 총회를 주도해 온 교단의 지도자들이 포항침례교회에서 소위 포항총회를 개최하고 한국기독교침례회라는 교단을 설립하였다. 한국 침례교의 이러한 분열은 선교부와 총회의 정책적 갈등, 타교단 교역자의 무분별한 영입으로 인한 부작용, 총회 내의 여러 파벌, 그리고 거기에 편승한 한국인과 선교사의 개인적 감정 혹은 한국인 사이의 개인적인 감정에서 비롯되었다고 하겠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결국 민족의 자긍심 대 선교부를 등에 없은 실제적 이권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열로 인해 특히 기독교한국침례회 측은 선교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어려운 상황에 처하였다. 그러나 1963년에 대전총회에서 일부 한국교역자들이 선교사들의 비행과 그들의 정책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고 선교사 배격운동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5년을 전후하여 신학교 출신 교역자들이 전입파를 반대하고 선교부의 독주를 견제하며 주권을 회복하려는 세력으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힘 입어 1968년 4월 소장파 목사들의 추진에 의해 두 개의 교단이 통합되어 ‘한국침례회연맹’이라는 교단이 출현하였다.
9년간의 교단 분열로 인해 한국 침례교는 분명히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분열은 한국 침례교로 하여금 세계의 침례교와 궤를 같이 하는 명실상부한 개교회 중심의 침례교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물론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미남침례회와의 연합으로 인해 한국 침례교는 독자적인 발전을 보지 못하고 미남침례회에 예속되어 있는 교회에 불과하다는 자성(自性)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한국침례회연맹은 1976년 교명을 다시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변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기독교한국침례회는 근래에 침례교 세계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정도로 세계에서 주목받는 교단으로 성장하였다.
지금까지 광복 후 한국의 침례교를 주로 기독교한국침례회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기독교한국침례회 이외에도 대한기독교침례회, 한국성서침례회, 그리고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라는 침례교 교단이 있다. 대한기독교침례회는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1946년 동아기독교가 감목체제를 회중체제로 바꾸고 임원 명칭도 변경하는 등 조직을 일신하려고 할 때 일제하의 구체제를 옹호하는 교인들에 의해 조직된 교단이다. 그리고 한국성서 침례회는 1954년에 들어 온 미국성서침례회에서 비롯된 교단이며, 대한선교침례회연합회는 1971년에 들어 온 미국 선교침례회에서 비롯된 교단이다.
Ⅵ. 의 견
지금까지 우리는 개신교의 한 교파인 침례교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침례교의 여러 특징과 세계사적 전개, 그리고 한국 침례교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광복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살펴보았으며, 17세기에 영국에서 시작된 침례교는 4백여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짧지 않은 오랜 기간에 걸쳐 발전해온 침례교이며 다른 교파에 비해 특이한 점은 다른 교파들은 주로 물을 뿌리는 방법에 의해 세례를 주고 있는 것에 비해 침례교는 아예 물 속에 담그는 방법을 통해 세례를 주고 있으며
특별한 신조와 신앙에 대한 단호한 선언도 없어 보인다. 누구나 양심의 지시대로 성경을 해석하며 과학과 교육에 새로운 해석이 생길 때는 그에 따라 신앙을 수정할 수도 있고 각 개인은 그리스도를 향해 마음을 열고 그리스도를 경배할 수 있다라고 되어 있으며.
침례교 일반에 관해 국내에서 발간된 연구 서적은 10여 종을 넘지 않는다고 하며 타 교파에 비해 문헌이
적어 잘 알려지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참고자료 : '침례교의 특징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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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3.10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589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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