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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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태조 왕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왕건의 생애
2. 왕건이 활동하던 시기의 배경
3. 왕건의 정치 및 정책
4. 왕건의 가족
5. 관련 유적 및 유물

본문내용

하고, 참소보다는 간언에 귀를 기울여 공명정대하게 정사를 보살펴 국가와 왕실의 안녕을 도모하며, 후백제 멸망으로 인해 고려에 대해 적개심을 가지고 있는 자를 공평하게 다스리며, 역사와 경전을 소홀히 말고 반성하는 자세로 임하라는 것이다.
4. 왕건의 가족
왕건의 부인은 29명이다. 왕건은 어째서 29명이나 되는 아내를 두어야 했을까?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고려 정권의 안정과 지방 호족과의 화합 정책을 위해 왕건이 혼인 정책을 펴다가 이렇게 많은 부인을 두게 되었다고 말한다. 구체적으로 왕건의 가계를 살펴보자. 왕건의 첫 부인은 정주에서 만난 유씨로 후일 신혜왕후가 된다. 왕건은 경기 지역의 대부호 유천궁의 딸인 유씨를 버드나무 아래서 만났다고 한다.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가다가 목이 말라 물을 청했다가 반해 그녀 집에 묵었고 결혼으로 이어졌다. 왕건은 유천궁의 재력이 필요했고 유천궁은 왕건의 군사력이 필요했기에 자연스레 혼인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녀는 당찬 여장부여서 결혼 후 왕건이 금방 떠나 돌아오지 않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는데 나중에 왕건이 소식을 듣고 데려왔다 한다. 또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 거사를 꾸밀 때 그의 성격대로 주저하자 거사를 주장하여 성공시킬 정도였다. 왕건도 그녀를 특별히 총애하였으나 불행히도 자식은 없었다.
장화왕후 오씨는 왕건이 서남해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해 나주로 밀고 들어가 견훤을 공략할 때 만난 여인으로, 왕건이 이 여인과 만난 이야기도 유명하다. 어느 날 진 위쪽 산 아래에 오색 서운이 있어 왕건이 가보니 샘가에서 아름다운 처녀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물 한 그릇을 달라고 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물을 떠 버들잎을 띄워서 공손히 바쳤다. 급히 물을 마시면 체할까봐 천천히 마시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 처녀가 바로 나주 토착세력인 나주오씨 집안 오다련의 딸이었다. 왕건은 처녀의 총명함과 미모에 끌려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는데 이 여인이 곧 장화왕후 오씨부인이다. 가문은 크게 빛나지 않았지만 왕건의 장남을 낳아 주었다. 이때의 장남이 바로 혜종이다. 혜종은 왕이 되기 어려울 정도로 어머니가 미천한 가문이었지만 다행이 아들이 왕위를 이어 한을 풀었다.
신명순성왕후 유씨는 충주 사람으로 다섯 아들과 두 공주를 두었다. 그 왕자들 중에 광종이 있었고 한 명은 승려로 출가해 증통국사가 되었다. 또 유씨가 낳은 두 딸 중 낙랑공주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56대 경순왕에게 시집을 갔다. 이것은 왕건이 신라 왕실과 귀족들을 화합하기 위해 시킨 것으로 왕건은 신라 왕실을 부마국으로 두는 전략이 들어맞아 경순왕을 따르던 신라의 수많은 귀족들이 새 왕조의 관료로 들어오게 만들었다.
제 4비로는 신정왕후가 있었는데 성이 황보씨로 삼중대광 황보제공의 딸이었으며 황해도 지역의 결연을 맺기 위해 정략적으로 혼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왕건과의 사이에서 성종의 아버지 왕욱과 광종의 왕비 대목왕후가 될 아들 딸을 낳았다. 전해지기로는 그녀가 왕건의 비 가운데서 후덕하고 인품이 좋았으며 슬기롭고 지혜가 있었다고 한다.
제 5비 신성왕후 김씨는 신라 왕족 출신이다. 그녀는 경순왕의 사촌누이였다. 경순왕 김부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로 경순왕이 신라를 들어 왕건에게 항복하자마자 혼인이 이루어졌다. 왕건이 먼저 경순왕에게 사신을 보내 혼인의 뜻을 비췄고 경순왕은 사촌을 보내 이에 화답했다. 이 결혼은 낙랑공주의 결혼과 함께 고려와 신라의 화합을 이루어내는 데 상당히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성왕후는 안종을 낳았다.
왕건의 비 가운데 가장 다산을 기록한 왕후는 제 6비인 정덕왕후였다. 그녀는 경기도 정주 출신으로 왕위군 등 4남 3녀를 두어 이 가운데 왕후 두 사람을 만들었다. 이런 것을 보면 고려 초기에는 왕실 안에서 부단히 근친끼리의 족내혼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건은 이들을 포함하여 헌목대부인 평씨, 정목부인 왕씨, 동양원부인 유씨, 숙목부인, 천안부원부인, 홍복원부인, 후대량원부인 등 모두 29명과 혼인했다.
이 부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지방에 거주했고 왕건과 같이 궁궐에서 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같은 혼인 정책의 부작용 또한 만만치 않았다. 흔히 왕들의 수명이 단명하여 많은 자손을 낳는 것이 왕실을 튼튼히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왕건의 경우 너무 많은 자손들과 부인 때문에 후대에 이르러 왕위를 둘러싼 골육상쟁이 일어나 고려 초기의 정권 안정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혔던 것이다.
5. 관련 유적 및 유물
사진
명칭
소재지
내용
비고
현릉
개성직할시 개성시 해선리
서기 943년의 고려시기 왕릉이다.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이다. 무덤에는 신혜왕후도 함께 묻혔다고 전한다.
도선국사비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월출산
왕건의 탄생설화에 나오는 도선의 도갑사에 있는 도선국사비.
만월대
북한 개성시 송악산 남쪽 기슭
만월대는 고려의 궁전이던 회경전을 중심으로 길이 약 445m, 너비 약 150m의 궁터를 말하기도 한다.
개태사
충남 논산군 연산면 천호리 소재 천호산
936년에 고려 태조가 후백제의 신검을 무찌르고 삼국을 통일한 것을 기려 황산을 천호산이라 개칭하고 창건하였다.
완사천
전남 나주시 송월동 1096-7
완사천은 샘과 버들잎, 물 긷는 처녀와 나그네가 주제가 되는 전설 가운데 하나로 알려진 곳으로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황왕후와의 전설로 유명하다.
신숭겸 묘소
강원 춘천시 서면 방동리 816-1/전남 곡성군 목사동면
고려시대 개국공신 신숭겸의 묘역이다. 울창한 소나무 숲 속에 있으며 영정각, 신도비각, 기념관, 재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그림의 묘역은 춘천시 묘.
묘역이 2곳에 있음.
6. 참고문헌
* 김은택 저 / 고려 태조 왕건 / 한국문화사 / 1996년
* 정성희 저 / 인물로 읽는 고려사 / 청아출판사 / 2000년
* 박영규 저 / 한권으로 읽는 고려 왕조 실록 / 들녘 / 1996년
* 박기현 저 / 손에 잡히는 고려 이야기 / 늘푸른소나무 / 2000년
* http://www.koreandb.net/KPeople/KPShow.asp?ID=0014027&Type=L
* 네이버, 엠파스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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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5.06
  • 저작시기20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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