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이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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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이승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개혁신학에의 한 탐구 이승구

본문내용

라는 것이다.
2) ‘성화의 영’에서
“인의의 무죄 선언은 직접 성화로, 다시 말해 새로운 삶의 형태로 이른다” 이는 하나님의 영이 가능케 하는 증인됨의 모습이다.
3) ‘진리의 영’에서
그는 “하느님의 진리는 하느님의 사건으로 계시된다. 그것은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을 변혁하는 것으로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서 입증된다. 성서적인 진리의 개념은 미래를 즉 하느님 나라의 도래와 더불어 이미 일어나는 세계 변혁의 목표를 지시한다” 이런 진술이 하나님의 진리가 그 자체로는 불변적이나 오직 우리에게는 사건으로 변화시큰 것으로 나타난다는 의미로 해석하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사건으로서의 진리 이해의 필연적 결과의 하나로서 행위, 또는 실천이 진리를 규정한다는 이해를 노출시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이론-실천관에 선 진리 이해가 실용주의나 Marxism의 입장과의 차이를 묻지 않을 수 없다.
7. ‘6. 자유의 나라의 시작’에 나타난 문제점
1) ‘교회 공동체’ 이해에서
크라우스는 교회 공동체가 “부활절과 주의 재림 사이에” 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도래하는 자유의 나라의 첫 번째 형태이며 대기실”이라고 본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 공동체가 구약적 언약과 어떤 구체적인 관련을 맺는지는 깊이 숙고하지 않았거나 그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는 것이다.
그는 ‘사회와 정치’라는 부분에서 하나님 나라는 “인간들에게 일어나는 혁명”이라고 보면서 “이 혁명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시작되며 정치적 사회적 삶의 영역에서 뚫고 들어오는 이 혁명 운동에 참여하도록 인간들을 격려하며 인간들에게 힘을 준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회 공동체는 1) 이 나라의 “전위대와 전령”으로 존속해야 하며, 2) 하나님 나라의 공격 사건을 그대로 집요하고 일관성있게 지향하고 따름으로서 모든 사회적 정치적 영역에 침투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에 참여하며, 일차적으로 교회 공동체에서 드러나는 그러나 모든 지역과 나라들을 혁신하고 세계 완성의 목표에로 나아가려는 ‘하느님의 정치 활동’에 참여한다고 말한다.
결국 하나님 나라가 혁명적이라는 것인데 그에 의하면 혁명이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정신적으로 소외된 인간을 인간 자신에 의해 급격히 그리고 의지적으로 지양하는 것이며 사회적 정의, 자유, 그리고 인권을 누리는 새로운 인간을 인간 자신에 의해 형성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2) ‘세상의 완성에 대한 희망’에서
크라우스는 그리스도의 종국적 나타나심이 미래적인 세계완성을 위한 것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온 세상을 위해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희망한다”고 한다. 그가 구원사의 객관호를 꺼려하는 한, 그리고 그 성취의 길을 “현실적인 역사”로 보는 한, 그리고 그 성취에 대해서는 시공간의 범주가 없다고 말하는 한, 1) 그가 말하는 일반적인 의미의 역사적 영광의 재림이라고 확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2) 그리고 그 마지막 상황에 대한 그의 묘사는 보편주의적 색체를 띠고 있다. 3) 또한 그는 그런 구조에 근거하여 투쟁을 요청하고 있다.
8. 마치는 말: 크라우스는 참으로 ‘하나님 나라 신학’을 제시하였는가?
그는 성서적 용어와 개념을 사용하면서도 그 배후에 있는 그 나름의 전제들을 포기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결국 그 자신도 칸트 이후적, 계몽주의 이후적 사고의 구조를 떨쳐 내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도 우발적인 과정으로 진술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진정 하나님의 통치였던가, 아니면 이 세상 구조의 전도였던가? 또한 여기서 우리는 그에게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를 위한 하나님”과 전혀 끊을 수 없게 연관시키는 것이 아니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책 말미에 붙이는 전도자와 목회자들에게 드리는 한 편의 종교적 강화
로마서 1:16 바울의 복음 이해와 전도 태도
사도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말을 복음(eujaggevlion)이라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살리며, 참 사람답게 만드는 참다운 의미에서의 “기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이 복음을 할 수 있는 한 여러 곳에 전하고 싶어했다. 전도에 임하는 그의 태로를 롬1:16절에서 발견할 수 있다.
첫째, 그는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하는 태도로 복음 전도에 임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복음은 경멸받고, 그것을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는 것이었다. 십자가의 도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바울은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복음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나 이 세상의 안목으로는 이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을 전할 때에 전함에 신경을 쓰다가 그 내용을 변질시켜서는 안된다. 복음 전도가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 미련하고 어리석은 내용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미련하고 어리석은 방법으로 전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사도바울은 고전1:24절에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하였다.
바울은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는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고, 알며, 여기서 그렇게 선포할 수 있는 바울의 복음 이해가 바로 그 이유이다. 복음 자체가 하나님의 능력이다. 이 ‘구원’은 종말론적 단어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임하여 온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느냐, 아니냐에 대한 엄위로운 말인 것이다. 지금 여기서 명확히 그 나라의 백성이 되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이 바로 복음이다. 이 복음은 또한 믿지 않는 자에게는 그 나라에서 제하여 버리는 효과를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도 하다.
오늘 우리들의 전도하는 태도와 목회 사역에 임하는 태도는 어떠한가? 바울처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려면 우리의 시야, 그 안목, 그 기준이 바뀌어서 이 세상이 미련하게 보는 것을 그 자체의 성격 상, 하나님의 능력으로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복음은 어리석은 것같이 보이지만, 그것이야말로 모든 믿는 이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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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0.06.03
  • 저작시기2007.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16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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