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영화를 통해서 본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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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황산벌 영화를 통해서 본 역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 영화 소개: 영화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왜 이 영화를 선정하게 되었는가 그 배경을 서술하였다.
■ 황산벌 전투: 황산벌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지도, 사진과 함께 서술하였다.
■ 역사적 평가: 황산벌 전투와 이를 각색한 영화 황산벌의 역사적 평가를 서술하였다.

본문내용

평야지대가 이어져 많은 수의 병력을 방어할만한 저지선을 찾기도 힘들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황산성이 계백장군의 마지막 격전지였다는 주장은 동의하기 힘들다. 황산성은 함지봉 해발 200m이상의 고지대에 있는 곳으로, 만약 이곳에서 마음먹고 수성전을 펼쳤다면 아무리 수적 열세였다고 해도 며칠은 더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계백장군은 이런 천연의 요새를 방패삼아 장기전을 펼칠만한 입장조차 되지 못하였다. 신라 김유신이 1만 정도의 병력으로 계백장군부대를 묶은 다음 나머지 주력 4만 병력으로 부여 사비성을 곧바로 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황산의 들에서 3영을 설치하고 신라군을 맞아 싸웠다고 되어있으며, 신라본기에도 계백장군이 먼저 도착하여 요지를 점령하고 있어 세 길로 나누어 공격하였다고 되어있다.
개인적으로 볼 때. '요지'라고 표현된 부분은 '부여로 통하는 주요길목'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계백장군은 부여로 통하는 주요 길목 세 곳에 진영을 설치한 후, 신라군이 그들을 넘어서지 않고서는 결코 부여로 갈 수 없도록 막아섰다.
한편 기한 내에 당나라군과 합류해야 되었던 김유신으로서는 최대한 빠른 길을 선택하여 가야했지만, 부여로 통하는 주요길목을 계백장군이 모두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른 속도로 돌파하기 위해 처음부터 총력전을 벌여야만 했다.
그런데 계백장군과 5천 결사대는 부여로 통하는 길목 요지에 3영을 설치하고서는, 삼방향으로 공격해 오는 신라군의 총공격을 필사의 의지로 막기 시작하였다. 전쟁의 범위는 점점 확대되어 연산면 전역에 걸쳐 이루어 졌을 것이며, 계백장군은 어떻게든 신라군을 황산벌로 밀어내어 어느 한 진영도 돌파되지 않도록 해야 되었다.
가뜩이나 적은 병력을 셋으로 쪼개어 신라의 대공격을 막아내어야 했던 형편이었지만 넓어진 전쟁터는 그들에게 더욱 불리하였다. 따라서 계백장군은 이미 여러 차례 패한 신라군의 사기가 꺾이기만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일단 신라군의 사기가 꺾이면 지공작전을 통해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할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마지막 한 가닥의 희망은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잘 알려진 사실처럼 관창이나 반굴 같은 어린 화랑들의 값진 희생을 통해 신라군은 다시 사기가 되살아났으며, 이미 여러 차례의 전투로 칠대로 지친 5천 결사대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황산벌로 향하는 계백장군은 피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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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0.10.05
  • 저작시기2009.4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633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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