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귄터 그라스]귄터 그라스의 집단적(공중적)기억과 타자성, 귄터 그라스의 통일관, 귄터 그라스의 이중적 여성상, 귄터 그라스와 알프레드되블린, 귄터 그라스와 테오도르폰타네, 귄터 그라스에 대한 비평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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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귄터 그라스]귄터 그라스의 집단적(공중적)기억과 타자성, 귄터 그라스의 통일관, 귄터 그라스의 이중적 여성상, 귄터 그라스와 알프레드되블린, 귄터 그라스와 테오도르폰타네, 귄터 그라스에 대한 비평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귄터 그라스의 집단적(공중적)기억과 타자성

Ⅲ. 귄터 그라스의 통일관

Ⅳ. 귄터 그라스의 이중적 여성상

Ⅴ. 귄터 그라스와 알프레드되블린

Ⅵ. 귄터 그라스와 테오도르폰타네

Ⅶ. 귄터 그라스에 대한 비평

Ⅷ.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사(前史) 내지는 구조사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의 정치적 내용을 문제삼는다. 특히 호르스트 크뢰거는 이 소설에서는 “그 뿌리까지 속속들이 정치적인, 거대한 소재가 목가적으로 개인화되고 경시되어, 단순한 세대갈등으로 축소되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니까 그라스가 68혁명의 의미와 성격을 잘못 판단하거나, 축소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독일에서의 전면적인 부정적 평가와는 달리 미국에서 이 소설은 대단한 반향과 찬사를 얻는다. 1970년에 이 소설의 영어판이 나오자 <타임 매거진>은 1945년 이후 독일작가로는 처음으로 그라스를 표지인물로 삼으면서, “마흔 두 살의 그라스는 물론 세계의, 혹은 독일의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그는 이 둘 모두일 터인데도”라고 격찬한다. <뉴욕 타임즈 북 리뷰>의 애나톨 브로야드도 『국부마취』는 “소설이 살아있을 뿐 아니라, 예전보다 더 건강하게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기법적으로 가장 설득력있는 증거”라고 평하고, “그라스는 자유주의자의 운명을 어렵게 만드는 저 무능력과 매저키즘과 절망적인 수단들을 가차없이 조소한다”고 하면서 그라스의 “불편부당한 태도”를 칭송한다.
이처럼 국부마취에 대한 독일과 미국에서의 상반된 평가는 분명 문학사회학이나 수용미학의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될만하다. 하나의 작품이 두 나라에서 이렇게 정반대의 평가를 받은 사례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이는 두 나라의 상이한 사회환경과 수용구조에 기인한 현상일 터이다. 하지만 이 글은 좀더 작품내재적인 측면에서 이 현상에 접근해볼 것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이러한 혹평이나 찬사가 모두 근본적으로 작품 자체에 대한 ‘오독’에 근거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선 라니츠키는 그리고 또한 아놀드도 국부마취가 ‘단치히 3부작’과는 전혀 다른 테마를 다루고, 그에 따라 완전히 새로운 서술원리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그는 소시민 세계의 ‘악취’가 어떻게 나치라는 정치적 현상으로 분출하였는가 하는 문제를 소시민적 시각에서 형상화한 ‘단치히 3부작’과는 달리 국부마취는 ‘국부마취’를 당한 것처럼 지적, 도덕적 정체상태에 빠진 60년대말의 서독사회를 교양시민의 시각에서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하고, ‘단치히 3부작’을 그라스 문학의 절대적 전범(典範)인 양 전제하면서, 그 척도에 따라 전혀 다른 차원의 소설을 제멋대로 재단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구성, 문체, 인물, 언어에 대한 라니츠키의 비판은 새로운 테마와 그에 따른 새로운 서술원리의 조응 관계를 살피지 않은 일면적인 비판이다. 라니츠키는 그라스가 이 작품을 ‘변증법적’ 소설로 형상화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호르스트 크뢰거의 ‘정치적’ 비판 또한 온당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그의 입론은 작가 그라스와 중심인물 슈타루쉬의 입장이 동일하다는 전제하에서만 타당하다. 하지만 슈타루쉬는 그라스가 아니다. 그것은 오스카르가 그라스가 아닌 것과 같다. 그라스는 ‘정치적인, 거대한 소재를 목가적으로 개인화’하기는 커녕, 정치적인 소재를 보다 입체적인 방식으로 조명하고, 다양한 입장들간의 모순과 긴장을 그려내고자 한 것이다. 크뢰거 또한 작품의 변증법적 성격과 알레고리적 차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과장된 ‘호평’도 정치적 의도 때문에 작품의 내재된 의미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데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비평들은 그라스의 의도가 셰르바움의 급진적 행동주의를 길들여 기존의 상황에 적응시키려는 데에 있는 것처럼 다분히 의도적으로 오역하여, 그라스를 마치 “미국 중산층 이데올로기의 대변인”인 것처럼 분식해 놓은 것이다. 그들은 이 소설이 셰르바움의 정치의식의 성숙과정을 그린 “정치적 교양소설”이 아니라, 진보에 대한 작은 믿음 못지 않게 쓰디쓴 멜랑콜리를 배음으로 깔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는다. 여기서도 이 작품이 지닌 변증법적 알레고리 소설의 차원이 진지하게 천착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Ⅷ. 결론
그라스는 원칙적으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해석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1985년 11월 말 TV 인터뷰에서 그라스는 자신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에게 해석을 통해 작품을 대하지 말고 작품 자체를 철저하게 읽으라고 권고하며, 해석자들이 (독문학자들이) 작품을 잘못 인도할 수 있다는 점과 독자들이 작품 대신 비평이나 요약을 읽는 풍조를 비판했다. 이 말은, 그라스 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 내용의 난해성과 다양성을,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으로 비평하는 사람들에 대한, 또 하나의 비평이라고 할 수 있겠다.
개인을 전체의 일부로 간주하는 나치즘의 전체주의를 직접 체험한 그라스는, 독일관념론과 헤겔의 총체성 철학을 전면적으로 불신하고 거부한다. 이를테면 보편적이고 집단적인 것에 대한 거부가 개별적이고 개인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라스는 독일 관념론 (Der deutsche Idealismus)을 일체의 총체화하는 사유방식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문학적, 정치적 활동의 중요 과제가 사라졌다가는 곧 다시 번성하는 독일 관념론의 뿌리를 뽑아 버리는 데 있다고 본다. “그라스가 독일 관념론을 비판할 때 항상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헤겔, 특히 역사를 ‘세계정신’의 구현과정으로 보는 그의 역사 철학과 국가론이다.” 그라스에게 있어서 역사는 인간에게 어떤 보다 숭고한 과제를 부여하는 과정도 아니고, 어떤 목적을 향해 전개되는 과정도 아니다. 역사는 오히려 부조리한 과정이다. 역사를 추진시키고 역사의 의미를 채우는 것은, 세계 정신이 아니라 개인들의 작은 행위들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권진숙,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연구, 문학박사학위논문,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1987
김누리, 알레고리와 역사 양철북의 오스카르 마체라트의 시대사적 함의에 대하여, 독일문학 65집, 1998
귄터 그라스, 양철북1,2, 민음사
박병덕, 귄터 그라스의 넙치에 나타난 서술기법,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2
박환덕,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독일문학의 이해, 서울대학교 출판부, 1994
조영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 독일 소시민 사회의 해부, 한국학술정보(주),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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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4.04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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