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지리여행] 기말고사 최종정리본 - 서거정, 대구십영, 강의 문화지형 발굴과 복원 및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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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 9장 서거정에 관하여
제 10장 대구십영(2)
제 11장 대구 십영 및 신 대구 십경
12주차 강의 문화지형 발굴과 복원 및 활용
13주차 강의 공산전투

본문내용

적 분석
※무태-연경동-지묘동-미대동-동화사(견훤세력근거지)-백안동-능성동 은해사 부근 -나팔고개- 살내(동화천)-파군재-왕산-독좌암(봉무동)-불로동-평광동-시랑이-매여동-안심(반야월)-금호강 건넘- 은적사 안일사- 왕굴- 임휴사 - 성주- 김천- 문경새재-충주- 개성
※무태
-일반적인 경로 - 왕건과 그의 군사들은 고려 태조 9년(927년) 늦가을 내지 초겨울에 개성을 출발하여 충청도의 충주와 전략 요충지인 문경새재를 넘어 경북 점촌, 상주, 선산을 경유하여 팔공산 기슭에 도달
-무태 지명의 유래
° 팔공산 기슭에 도차한 왕건과 그의 군사들은 지금의 서변동인 무태를 지나게 되는데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곳부터는 견훤의 군대가 매복해있을 수 있으므로 태만하지 말고 각별히 경계하라는 의미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을 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
°전자의 설득력
- 개성으로부터 출발하여 오랜 기간동안 먼 거리를 왔고, 또한 팔공산 주변에는 견훤의 군대가 매복해있을 가능성이 있었으므로 왕건은 그의 군사들에게 충분한 주의를 줄 필요가 있었음
※연경동
-왕건이 무태를 지나 지금의 연경동쪽으로 이동하는 도주엥 이곳 마을에서 책을 읽는 소리를 읽고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던 사연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음
-한문 경서를 소리내어 읽고 그 뜻을 새기면서 공부를 한 것으로 판단
°연경이라는 동네 지명이 생겼다는 이야기는 타당성이 있어 보임
※지묘동~은해사 부근
-지묘동을 동과하고 팔공산 연한 작은 분지인 미대동을 지나 후백제 지원 세력들을 진압하기 위해 동화사로 왕건의 군대는 가게됨
-왕건은 동화사 일대에 은거하던 서규모 후백제 세력들을 진압한 후 후백제의 주력부대가 어디에 있는지를 캐묻게 됨
-동화사 일대에 잔존하던 후백제 세력들은 염탄꾼들로 왕건과 그의 군대는 후백제 염탐꾼의 거짓 정보에 빠져 팔공산 기슭의 작은 분지인 백안동을 거쳐 동화천의 상류인 능성동의 능성재를 넘어 은해사 일대로 가게 됨
※나팔고개
-왕건군대가 전투에 패해 도망가고 있는 도중에 추격하는 견훤군대의 나팔소리를 듣고 이 고개에 들었다고 하여 나팔고개가 됨
-은해사 근처에서 왕건과 그의 군대는 매복하고 후백제 군사를 기다리고 있었음
-동화사의 염탐꾼들에게 미리 거짓 정보를 흘려 이곳까지 왕건과 그의 군대를 유인 -견훤의 넷째 아들 금강왕자는 역매복하고 있다가 뒤에서 역습하여 왕건의 군대에 큰 타격을 줌
-영천 서쪽 30리 부근에 위치한 조그마한 산봉우리인 태조지까지 왕건과 r의 군대는 퇴각하여 고려의 지원군이 올 동안 일단 퇴각하기로 함
-능성재를 넘어 다시 무태 쪽으로 돌아가던 중 현재의 지묘동 보성타운 근처 완만한 고개에 이르렀을 때 왕건의 군대를 추격하는 견후너 군대의 진군 나팔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나팔고개라 불림
※살내
-왕건군과 견훤군이 양측에서 발사한 화살이 내를 가득 메웠다하여 내에 살이 가득하다는 의미로 살내라 함
-작은 하천을 사이에 두고 가득 메운 화살 살내(전탄)
-현재의 서변동과 동변동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동화천의 하류로서 동화천이 금호강으로 합류하는 부분
※왕산
-왕건이 견훤군사에패하고 후퇴하여 앞으로 토르를 고민하고 잠시 머물렀다는 데서 유래
※지묘동
- 왕으로 변장하고 견훤의 군사를 속여 왕건을 지키고자 한 신숭겸장군의 지략이 기묘하다고 하여 지묘동이 되었다고 유래
※왕산 및 파군제
- 동화천을 경계로 서쪽인 서변동은 고려 군대가, 동족인 동변동은 후백제 군대가 진을 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음
- 전투는 일시적으로나마 지원군을 등에 업은 고려군이 약간씩 전세를 회복하여 지금의 왕산부근까지 진격하여 이곳에서 왕건과 견훤은 일생 일대 최대의 전투를 벌이게됨
- 고려군대는 지금의 파군치에서 후백제군에게 크게 패하여 왕건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수와 군사를 잃게 되고 왕건은 생애 최대의 위기를 맞음
-파군재(파군치)라는 지명
-왕건은 파군재에서 대패당하여 목숨조차 부지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음
- 장절공 신숭겸이 왕건 복장을 하고 왕건처럼 해동하기로 하고 왕건은 단신으로 사지를 빠져나옴
-지묘동 : 전략적 지혜가 기묘했다는데서 옴
※독좌암
- 왕건이 견훤군사에게 대패하여 수하들을 다 잃고 도주하던 중 앞날을 걱정하면서 홀로 앉아 있었던 바위라 하여 독좌암이라 불림
※불로동
-왕건이 지나다 아이의 모습만 보여 어른이 없는 동네라하여 아니 불 늙을로 동이라 불렀다.
※시랑이
-실왕리였는데 나중에 시랑이로 불림
-물과 주먹밥을 얻어 먹고 기운을 내 떠난 후 나무꾼이 다시 와보니 왕건이 없어서 왕을 잃어버린 의미로 실왕리라 불림
※안심
-율하천을 내려와 견훤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쳤다 생각하고 왕건이 스스로 안심해게 되었다는 뜻으로 안심으로 불림
2. 금호강 건너기 이후
※금호강 건넘
-타루터가 있는 곳 이용
°견훤 군대의 추격을 완전히 뿌리치기 위해서는 대구분지를 동서로 흐르는 금호강을 건너야만 했음
-통일 신라 말기의 나루터 위치에 관해서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비교적 지형 변화가 적었던 1910년대의 지형도와 지형적 특성을 분석해보면 짐작 가능
-1910년대에 일본이 작성한 지형도에서 반야월 서쪽 금호강 어느 나루터의 기능을 담당했는지 증거가 없음(나루터는 견훤세력 근거지라 가지 않았을 것임)
°고모동 부근의 금호강 이용
-반야월 바로 다음 지명은 수성구 고모동인
-하폭이 가장 좁아서 강을 건너야만 하는 왕건에게는 좋은 장소
°왕건이 금호강을 건넌 후 앞산까지 왕건의 행적
-기록이나 전해지는 말조차 없음
-1910년 지도상에서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해 추측한 자료는 있다
1. 금호강- 고모동- 담티고개- 남부시외버스터미널-범어네거리-유신학원네거리-청운맨션 후문- 구 대구중학교 서편도로- 상동교 서편- 협성고 동편- 앞산순환도로 - 큰골- 은적사로
2.금호강-고모동-연호동-범물동-지산동-수성못-상동교-협성고동편-앞산순환도로-큰골-은적사
°첫번째 도주로가 더 근거있음
°팔현 마을 일대는 금호강 유역의 습지라는 사실과 습지는 속성상 머지않아 육지화가 되므로 1000년 전 당시 팔현마을 일대는 가장 수심이 얕거나 소규모 습지였을 것으로 추측. 범어네거리는 고려시대에도 중요한 교통요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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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9.07
  • 저작시기2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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