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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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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개요

Ⅱ. 에드바르트 뭉크의 일대기

Ⅲ. 에드바르트 뭉크의 오이디푸스갈등

Ⅳ. 에드바르트 뭉크의 작품
1. 병든 아이
2. 봄, 1889
3. 뱀파이어
4. 사춘기
5. 절규
6. 생명의 춤

Ⅴ. 에드바르트 뭉크의 자화상

Ⅵ. 에드바르트 뭉크에 대한 평가

참고문헌

본문내용

잘라야 했던 고흐를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평소에 의식하지 못했던 것들이 내부에서 터져나오고, 거울에 몰두하기란 힘든 일이 된다. 하지만 거울에서 눈을 돌리면 자화상은 사라진다. 또 다시 외부가 나의 자화상을 채우게 될 뿐이다. 자신을 의식하고 그 내부로 들어간다는 것은 현대인에게 큰 고통이다. 현대 영시의 새로운 개척자 T. S. 엘리엇은 단테의 『신곡』을 인용하여 이렇게 이야기했다. “지옥이라는 곳이 한 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곳이 정말 분명하다면, 나는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이야기를 당신에게 하겠소. 하지만 지옥이라는 곳에서 돌아올 확률이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난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없소.”(「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의 프롤로그)
현대인들은 자신을 철저히 감추고 살아가고 있다. 오로지 외부를 향해 눈을 돌릴 뿐이다. 그 외부를 향한 눈은 날카롭고 냉철하지만, 내부를 향한 눈은 언제나 감겨 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내부로 향하는 행위는 현대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인 것이다. 겉은 언제나 화려하지만 그 속은 마치 회칠한 무덤처럼 썩어 악취를 풍기는 까닭이다.
뭉크는 유난히 자신의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인생을 통해 변천되어진 자신의 모습을 그리면서 자신을 반성하며 뒤돌아보았다. 뭉크의 자화상은 내면성의 고백, 죽음에 대한 갈등, 대결, 불안 등에 대한 상징으로서 자기완성을 향한 일종의 노력이었다.
고흐가 자신의 자화상을 그리고 미쳐 버린 것은 그 작업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가에 대한 반증이다. 여느 사람이었다면 거울 속에 나의 겉모양만 담아내면 그만이다. 하지만 고흐는 그 겉모양뿐만 아니라 그 내면까지 담아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결국 미치광이가 되었지만 그래서 더욱 말짱해질 수 있었다. 뭉크도 고흐처럼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뭉크는 고흐처럼 결단력이 강한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죽음에 대한 지나친 공포는 무의식의 그로 하여금 더욱 살고싶다는 욕구의 반증인지도 모른다. 정신분석학에서는 극과 극이 통한 다는 것을 반동형성이나 투사의 방어기제를 통해 설명하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가끔 그런 무의식적 욕구를 튀어나온다. 그의 그림 <미역감는 남자들>(각주 12번 참조)은 그런 관점에서도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하다.
뭉크의 작품 <여자 마스크 밑의 자화상(1892)>에는 특별히 죽음에 대한 갈등이 나타나는데, 붉은 벽면 위에 침통한 표정을 한 여자의 대형 마스크가 걸려 있으며, 자화상은 무표정한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붉은 마스크는 아마도 그의 어머니, 누이의 죽음을 상징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두 죽음으로 인해 항상 죽음의 압박과 고뇌를 느끼는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혹은 여성이라는 존재에 대한 공포나 불안에 대한 형상화일 수 있다.
<저승에서, 자화상(1895)>은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생의 고뇌에서 벗어난 자신의 모습을 검은색과 붉음을 주조로 그리고 있다. 저승이라는 극한적인 상황 속에서 모든 불안과 고뇌에서 해방되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는데, 자화상의 얼굴 표정이 암울한 것으로 보아서 아직까지는 그런 의지에 확신이 없음을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이런 죽음을 향한 의지는 그의 초기 자화상인 <뼈가 있는 자화상(1893)>에서도 극명히 나타난다. 많은 자화상 중에 이 작품은 가장 유명한 것으로 검은 바탕 위에 정성 들여 소묘식으로 표현한 얼굴만이 나타나고 있다. 항시 죽음을 응시하고 늘 응시해 온 그에게 하단의 해골은 죽음에 대한 내적인 형상화라고 하겠다. 하지만, 그는 죽음을 선택하고 싶었지만, 죽음은 무서운 것이라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가 더 지배적이었던 것 같다.
일생을 통해 꾸준히 자화상을 그린 까닭에 뭉크는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유지하며 살 수 있었던 것 같다. 항시 거울을 보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응시하고 미래로의 새로운 다짐을 굳게 했던 그였기에 나치의 집권 하에서 굴종하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지조도 지키게 된다. 어떤 미술 비평가는 그가 나치에 대해 복종하지 않았던 것은 일종의 고집이었다고 본다. 이는 자신의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었던 그림에 대해서 퇴폐적이라고 낙인찍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본다. 아마, 나치가 그의 그림을 인정해주었더라면 그는 나치에 복종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럴 가능성은 다분하다. 하지만, 난 자화상을 자주 그린 던 그의 행동에서 이 불복종의 이유를 찾고 싶다.
Ⅵ. 에드바르트 뭉크에 대한 평가
노르웨이의 가장 위대한 화가 뭉크는 후기인상파 화가들의 기법을 사용, 16세기 이래 4세기 간 공백으로 지속된 독일 회화 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내면적 갈등 불안 공포 애정의 인간의 내면을 격렬한 색과 왜곡된 선으로 담아내어 보는 사람 역시 같은 감정을 만들어 내게 하는 이 기법은 미술사 흐름의 한 전환점을 제시하고 있다. 그의 예술은 내면세계의 어둠에 주목하고 주관적, 독창적인 자신의 예술세계를 이뤄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된다.
그의 일생은 건강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죽음, 잇따른 누나의 죽음과 의사였지만 이상성격자였던 아버지. 이러한 환경과 생활에서 그는 일생동안 악의에 찬 위험이 육박하고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공포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생활을 하였다. 때문에 그는 정신분열 증세까지 일으켰다. 하지만, 그는 그런 강박관념에서 자신의 작품이 생산되었다고 야기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환경 때문인지 그의 그림에서는 밝음과 경쾌함보다는 어두운 음습함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그림에 공포를 느끼고 감각적 위안을 받기 위해 또 그렸다. 어찌 보면 그의 작품은 모두 그의 어두운 삶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문헌
◈ 도병훈(2007), 나와 너의 세계미술, 책을 읽다
◈ 롤프 스테너센 저(2003), 에드바르드 뭉크, 눈빛
◈ 박경래(1980), 뭉크 ,금성출판
◈ 이규희(2008), 뭉크클레, 지경사
◈ 토마스 M·머써(1991), 뭉크 작품집, 중아일보사
◈ J. A 빈센트, 조선미 역, 미술의 이해, 이대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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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09.25
  • 저작시기2021.3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4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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