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급일본어활용2]일본의 관동과 관서지방에 대해 정치, 경제, 지리, 역사, 사회, 문화면 중에서 한 분야를 정해 두 지역을 서로 비교 - 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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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급일본어활용2]일본의 관동과 관서지방에 대해 정치, 경제, 지리, 역사, 사회, 문화면 중에서 한 분야를 정해 두 지역을 서로 비교 - 일본어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前書き (서론)

Ⅱ. 社会文化麺で関西地方科関東地方比較 (사회문화 면에서 관서지방과 관동지방 비교)
1. 芸術 (예술)
1) 関西地方の芸術 (관서지방의 예술)
2) 関東地方の芸術 (관동지방의 예술)
2. 食べ物文化比較 (음식문화 비교)
3. 関西地方と関東地方の言語(なまり) 比較 (관서지방과 관동지방의 언어(사투리) 비교)
4. 商取引比較 (상거래 비교)
5. 個人の性格比較 (개인성향 비교)
6. 趣向比較 (취향 비교)
7. 余暇生活比較 (여가생활 비교)
8. スポーツ比較 (스포츠 비교)

Ⅲ. 結論 (결론)

[参考文献] (참고 문헌)

본문내용

んね)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한다. 일본사람이 특징은 本音과 建前이 특징이다. 本音은 솔직한 속마음을 말하며, 建前은 속마음이 아니라 겉마음을 말한다. 관서지방 사람들은 東京사람들에 비하여 本音으로 말하고 행동한다고 한다.
實例로 잡지 등에 할인권이 붙어 있는 경우가 있다. 즉 그 할인권을 가지고 가면 몇 백원 할인 아니면 5∼10%할인을 해주는 것을 말한다. 관서지방 사람들은 큰 회사 사장님부터 초등학교 학생들까지 전부 쓴다고 한다. 그런데 동경사람은 안 쓴다고 한다.
창피하다는 것이다. 이 면에서는 얼굴보다 實利를 추구하는 것이 관서지방 사람들이다.
다른 예로는 관서지방 사람들은 바비큐를 잘 하며, 어떤 사람들은 자기 차 트렁크에 아예 바비큐 세트를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관서지방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참 가정적이고 좋은 취미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동경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면 아예 輕視를 한다고 한다.
8. 스포츠 비교
프로야구만 해도 그렇다. 東京은 巨人자이안트 가 있고, 관서지방은 阪神타이거스가 있다. 阪神타이거스의 홈구장인 甲子園야구장에서 巨人 : 阪神의 경기는 언제나 만원이고 다른 팀과의 경기에 비해 입장료도 비싸다. 다른 팀에 이겼을 때보다 巨人에 이겼을 때가 더 시끄럽고 더 시원하다.
 관서지방 사람들은 관동지방 사람들에 비하여, 정보에 민감하다고 한다. 관서지방 안에서도 도시 및 각 지역에 틀린 문화를 각지고 있다. 각 도시 및 지역은 자기 나름대로, 싸움을 할 정도로 프라이드가 높다.
그리고 관동지방에서는 일찍이 스모가 발달하였으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또한 스모는 천황이 도쿄에서 열리는 대회에 자주 참석하게 됨으로써 일본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이기도 하다. 스모의 경기 방식은 두 사람이 서로 맞잡고 넘어뜨리거나, 지름 4.6m의 씨름판 밖으로 밀어내거나 하며 힘과 기술을 겨루는 스포츠로 개인이 벌이는 경기이다 .
일본사람들은 이 스모를 한자로 표기할 때 '相撲'이라고 쓰며, 이 스모를 하는 씨름꾼을 리키시力士라 하고, 스모를 겨루는 장소를 土俵라고 하는 독특한 이름으로 부른다.
14세기 중엽 야마토사루가쿠의 結崎座에 觀阿彌淸次의 출현으로 노는 일대 비약을 이루었다. 그는 흥미본위였던 야마토사루가쿠의 노에 덴가쿠의 장점과 오우미사루가쿠의 唯美主義를 섭취하여 장구한 생명력을 지닌 노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특히 당시 유행하던 曲舞를 노의 주요부분에 도입하여 음악 부분에서도 커다란 개혁을 이루었다.
그의 아들 世阿彌도 뛰어난 천재였으며, 노를 한층 우아한 무대예술로 발전시켰다. 지붕이 있는 전용무대와 能面이라는 가면을 사용하며, 각본 , 음악 , 연기 등도 독특한 양식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양식은 에도江戶시대에 들어서면서 德川 봉건제의 일환으로 편입되었고, 幕府의 儀式藝能이라는 틀로 고정되었다. 그리하여 에도시대의 노에는 무사도적인 색채가 농후하였으며, 예술로서의 완성보다 氣魄의 예리함 쪽이 중시되는 경향이었으나 본연의 모습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메이지明治시대에는 쇼군將軍과 다이묘大名의 원호에서 받은 영향으로 노는 한때 중단되는 듯 하였으나, 귀족과 신흥재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고상한 취미라는 간판으로 大正 , 昭和의 융성기를 맞이하였다
 
Ⅵ. 결 론
일본의 관동과 관서의 대립은 우리나라의 영호남 대립과는 많이 상황이 다르다.
서울을 제외하면, 일본의 쿄오토와 비교할만한 정치문화의 중심지가 우리나라에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근대, 현대의 영호남 대립관계와 비교될만한 지역대립을 일본에서 찾자면 중국지역과 동북지역이 어울릴 듯하다.
막부파였던 동북인들은 메이지유신의 주체들이었던 사츠마와 초오슈번 사람들에게 패하면서 패자의 수모와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군대에 의한 민간인 피해도 있었고 동북지역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지금까지도 존재한다.
그런 이유로 두 지역사람들은 관동관서식의 심리적 경쟁관계가 아니라 적대의 관계에 가깝다.
서로간의 물리적 충돌도 아직까지 일어나고 있다.
물론 일본에 있어서 동북인들의 역사적 위치와 가치, 영향력은 우리나라 호남인들의 그것과는 분명 다르다.
다만 지역감정, 지역차별로 나타나는 현실적 문제나 사회적 행태는 비교될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하다는 것이다.
특정지역 출신에 대한 편견, 차별, 그에 대한 이론적 정당화, 소문들, 그리고 그로 인해서 나타나는 피해의식, 지역편차, 계층분화, 심지어 차별 때문에 출신지역을 밝히기 꺼려하는 안타까운 현실마저도 똑같다.
일본에서 관동관서의 경쟁 심리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적 중심이 쿄오토에서 토쿄로 이동하면서 생긴 관서인들의 박탈감일 듯 싶다.
우선 에도막부가 창설되면서 정치적 실권이 관동으로 가버린 것, 그리고 대정봉환 후 일왕이 토오쿄로 옮겨오면서 수도로서의 역사적 정통성마저 사라져 버린 것이다.
비록 에도시대에 정치적 실권을 관동으로 넘겨주었다 해도 관서는 일본역사 이래 유일의 수도였으며 문화적, 경제적 중심이었다.
근대이후에 그것들을 차례차례 관동지역에 뺏기게 되면서 관서는 일본의 중심이 아니라 지방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잘나가는 지방이다.
기타 다른 지역과는 비교조차 안 될 정도로 강하고 관동과 맞먹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관동인들이 보기엔 날고 기어봤자 지방인데 자꾸 지방 아닌 것처럼 티내고 다니는 관서인들인 것이고, 관서인들이 보기엔 일본문화의 정수를 대부분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데 힘으로 권력 빼앗고 일왕 빼앗고 수도 빼앗아가서 우리가 중앙이고 니들은 지방이라고 무시하는 졸부가 관동인들인 것이다.
[참고 문헌]
이춘규, 일본에 대해 알지 못했던 것들, 강, 2009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 일본사회와 문화, 제이앤씨, 2006
이토 아비토, 임경택 역, 일본 사회 일본 문화(동경대 특별 강좌), 소와당, 2009
나카네 지에, 양현혜 역, 일본 사회의 인간관계, 소화, 2002
구견서, 현대 일본사회의 이해, 한울, 2001
김영, 일본 문화의 이해, 제이앤씨, 2007
이에나가 사부로, 이영 역, 일본문화사, 까치,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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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1.10.05
  • 저작시기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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