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 사건
본 자료는 4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해당 자료는 4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4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목차

1. 서론

1.1 해방이후의 사회상황
1.2 남로당

2. 본론

2.1 사건의 불씨, 3.1 사건
2.2 4.3 무장대 습격
2.3 4.28 평화회담
2.4 5.10 선거
2.5 토벌

3. 결론

본문내용

8일에 걸쳐 육지로 철수했다.
그러나 학살은 이에 멈춘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도내 도처에서 소위 '전향자' 에 대한 대검거 및 처형을 재개하였던 것이다. 이 와중에서 경찰은 대정, 한경, 한림, 애월, 안덕, 중문, 서귀 등지에서 이전에 체포되었다 풀려난 양민들을 예비검속이란 명목 하에 소집하여 모슬포 송악산 부근 섯알오름에 위치한 식민지 시대의 탄약고로 끌고 간 다음, 이들을 학살했다. 사망자 192명, 도민들은 뒷날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시신을 수습하여 사계리 공동묘지에 '백 할아버지에 한 자손의 땅'이라는 뜻의 백조일손지지 (百祖一孫之地)를 조성하여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기리고 있다.
4.3 사건은 애당초부터 성취할 수 없는 목적을 실현시키려 했던 남로당의 극좌 모험주의의 산물이었다고 혹자는 말한다. 남북의 분단이 기체제로 가고 있던 남한지역에서 공산체제를 구축하려 했다는 점에서 대세를 역행했고, 이러한 댓가는 예정되어있던 것이다.
3. 결론
제주도 4.3 사건을 거론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대규모의 유혈참사이다.
발발 초기의 인명 피해상황을 보면, 제 1기 공방전이 끝난 직후 발표된 미군정 경무부의 자료 및 제주도비상경비사령부의 자료에 따르더라도 사망인원 42명 ~ 162명, 부상인원 98명 ~ 110명, 납치인원 8명 ~ 299명에 지나지 않던 인명 피해상황이 폭동 말기에 이르러서는 엄청나게 증가한다. 그러나 정확한 수치는 제시되지 못하고 있고, 최소 4만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추론될 뿐이다. 정부 측이 제시한 자료만 해도 한국편람(1956년)에는 4만명이, 1960년 국회의원 김성숙이 제출한 제주도 양민 학살 건의안에는 5만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되어있고 1963년 제주도 당국이 발행한 제주도 제 8호에는 80,065명의 인명피해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4.3 사건이라는 수업시간의 자료화면에서도 그랬지만 직접적이고 공격적인 반미 무장투쟁에 직면한 미군정은 처음 당황하여 폭동의 성격 및 그 강도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따라서 그 대처도 효과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사건의 성격이 보다 명료해지자 미군정은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의 구축이라는 대한정책의 목표를 관철하기 위하여 적극적이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섰으며, 이러한 점이 대규모의 유혈사태를 발생시키게 된 것 같다.
그러나 4.3사건의 더욱 중요한 의미는 그것이 이후에 남한 정치체계에 미친 영향이라는 생각이 든다. 4.3사건은 남한정부에 대한 가장 중요한 최초의 군사적 도전이었고, 남로당으로 하여금 무장유격투쟁 전술로의 이행을 촉진케 한 주요한 계기를 이루는 사건이었다. 4.3사건은 정부의 정통성을 위협하여 새로운 통치 질서의 수립에 부정적인 역효과를 가져오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여순반란사건과 더불어 군부에게 군 내부에 침투해 있는 좌익세력에 대한 숙청으로 권력의 평등화를 이룰 수 있게 하였고, 많은 게릴라 반공의 경험으로 남로당의 자신감을 제고시켰다고 할 수 있다.
제주 4.3사건은 공산세력의 주도로 일어난 사건으로 폄하되어 오랫동안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그런 측면이 없지 않지만 사실상 이 사건은 대다수의 제주민중들이 분단을 저지하고 한민족의 통일을 지향했던 반외세 자주 항쟁으로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되어 나타난 이 제주 4.3 사건은 한 마디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이지만, 이제 우익이니 좌익이니 하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와 사회를 다시 생각할 필요성이 있다.
참고한 여러 서적에서는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 배경을 제주도민의 배타성이라는 점에 기인하고 있다는 서술이 많은데 이러한 제주도민의 배타성은 섬이라는 고립된 지형적 특성, 도민끼리의 결혼이 잦아 그 혈족관계가 깊은 이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렇듯 배타적인 성향을 가진 제주도민에게는 관공요직에 외지인들이 임명된 것은 큰 반발을 낳기도 했다. (일부에서는 이것이 제주 4.3 사건의 가장 큰 발발원인이었다고 말하는 시각도 있다.) 이러한 제주도민의 배타성으로 말미암아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제주도민의 사회주의적 성향은 취약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좌익적성향의 단체들이 47년 대거 그 집단에서 나와 우익적 성향의 집단에 가입한 사실을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바로 정치적 이유에서가 아닌 주민의 유대감- 온정주의에 의한 이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일보 1948년 6월 5일자 사설 “제주사태 수습에 관하여”에서도 제주도민간 혼인이 많으므로 도민 대다수가 폭도측에 척분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자도민을 우선 비호하는 배타적인 도민들이 흔히 폭도측 청년에 대하여 동정적 경향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였으며, 논조는 다르지만 노력인민 1948년 5월 25일자 “구국전선의 선봉대로 단정단정 분쇄에 사투”에서도 이와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경찰, 인민해방군이 모두 도민들과 혈연으로 맺어져 있는 도민 출신이 많고, 그 가운데에 도민들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부인이 섞여 있는 집단이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내부적 갈등, 외부적 갈등이 파생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중앙일보 1948년 6월 17일, 7월 11일자에는 희생된 주민들은 경찰의 친척인 경우가 많았고 이에 따라 일부 경찰은 복수전으로서 강압적인 폭력을 휘둘렀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제주도민의 혈연관계가 4.3 사건의 폭력성을 심화시키는 데에 일조했음을 알 수 있다.
일부 외부의 시각에서는 경찰과의 잦은 대립을 보면서 제주도의 좌익적 성향을 크게 보는 경향이 있지만, 위의 사설에서도 알 수 있듯, 제주민의 배타적 성향으로 인한 사건으로 보여진다.
결론적으로 제주 4.3 사건은 편중된 시각으로 단정 지은 성급한 결론으로 인한 유혈사태였다. 그들은 남로당과 손을 잡긴 하였으나, 단지 민족의 한 사람으로써 통일을 염원하고 단지 살기 위한 처세였다. 경솔했던 판단은 고스란히 ‘동족의 넘쳐나는 피’로 그 댓가를 치러야했다. 수많은 희생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이러한 일이 생기지 않도록 그 진실규명에 힘써야 하며, 그 진실규명에 있어 제주도의 지역적 특성을 배제 시켜서는 안된다.
  • 가격2,000
  • 페이지수12페이지
  • 등록일2011.10.14
  • 저작시기2009.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08487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