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을 읽은 소감을 정리하고자 한다. 너무 깊게 들어가지 못하고 대략적인 정리만 할 수 있을 것 같아, 좀 아쉽지만 나의 글을 써내려 가보겠다.
# 조선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고 볼수 있다. 당시 고려의 왕들은 자신의 시호 앞에 충을 붙였었는데 이는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할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상투나 당신을 뜻하는 접미사 ‘치’도 몽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꼭 나쁘다는 시각에서만 볼 것은 아니다. 본래 문화라는 것은 변동이 되기도 하고 다른 문화가 흡수되어 변화되어 가면서 좋은 문화는 좀 더 발달되어 우리의 문화로 장착이되고, 그렇지 않은 문화는 조금씩 시간에 의해 사라져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고 그 시기에는 백성들의 혼란이 심했다고 한다. 중국 대륙과 고려북쪽, 고려 남쪽에서는 많은 전쟁과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는 세력으로으로 안정되지 못하였다. 이 때 공민왕은 자주를 위해 원나라와의 관계를 끊기위해 사대부를 등용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 노력중에는 관문세족이 빼앗은 땅이나 곡식등 모든 재산들을 다시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원하는 자에 한해서 로비에서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관문세족이 가만
히 있을리 만무했다. 역시나 다시 반발이 일었고, 공민왕이 시해되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마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다. 이 때 공민왕 뒤를 이은 우왕은 공민왕과는 반대로 액탈을 일삼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다고 한다. 이시기에 요동정벌을 꿈꾸던 세력이 나타나는데 이 중심에는 최영이 있었다. 그에 반해 이 계획을 반대한 세력도 있었는데 이의 중심이 바로 이성계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세력에 밀려 결국 요동을 진군을 하게 된다. 하지만 웨에서 이성계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위화도에 머물게 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위화도회군이 바로 이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왕은 폐위가 된다. 다음으로 창왕이 등극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공양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다. 이 시기에는 정몽주가 주축이 되어 이끄는 고려개혁파와 이성계가
이끄는 역성 혁명파가 있었다. 하지만 정몽주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이는 사건으로 정몽주는 목숨을 거둔다. 자연스럽게 정몽주가 이끌던 고려개혁파는 사라졌고, 이성계가 추대되어 왕위에 올라 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면서 항상 영토를
# 조선의 역사는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부터 시작된다고 볼수 있다. 당시 고려의 왕들은 자신의 시호 앞에 충을 붙였었는데 이는 원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할 것을 의미했다고 한다. 상투나 당신을 뜻하는 접미사 ‘치’도 몽골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런 문화가 꼭 나쁘다는 시각에서만 볼 것은 아니다. 본래 문화라는 것은 변동이 되기도 하고 다른 문화가 흡수되어 변화되어 가면서 좋은 문화는 좀 더 발달되어 우리의 문화로 장착이되고, 그렇지 않은 문화는 조금씩 시간에 의해 사라져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왕위에 오르고 그 시기에는 백성들의 혼란이 심했다고 한다. 중국 대륙과 고려북쪽, 고려 남쪽에서는 많은 전쟁과 호시탐탐 침략의 기회를 엿보는 세력으로으로 안정되지 못하였다. 이 때 공민왕은 자주를 위해 원나라와의 관계를 끊기위해 사대부를 등용하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이 노력중에는 관문세족이 빼앗은 땅이나 곡식등 모든 재산들을 다시 백성들에게 돌려주고 원하는 자에 한해서 로비에서 양인으로 해방시켜 주기도 했었다. 하지만 관문세족이 가만
히 있을리 만무했다. 역시나 다시 반발이 일었고, 공민왕이 시해되고 다시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고 마는 안타까운 상황이 되었다. 이 때 공민왕 뒤를 이은 우왕은 공민왕과는 반대로 액탈을 일삼고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했다고 한다. 이시기에 요동정벌을 꿈꾸던 세력이 나타나는데 이 중심에는 최영이 있었다. 그에 반해 이 계획을 반대한 세력도 있었는데 이의 중심이 바로 이성계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세력에 밀려 결국 요동을 진군을 하게 된다. 하지만 웨에서 이성계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위화도에 머물게 되고 다시 개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위화도회군이 바로 이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우왕은 폐위가 된다. 다음으로 창왕이 등극하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 공양왕을 왕위에 오르게 한다. 이 시기에는 정몽주가 주축이 되어 이끄는 고려개혁파와 이성계가
이끄는 역성 혁명파가 있었다. 하지만 정몽주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죽이는 사건으로 정몽주는 목숨을 거둔다. 자연스럽게 정몽주가 이끌던 고려개혁파는 사라졌고, 이성계가 추대되어 왕위에 올라 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면서 항상 영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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