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중심주의와 중세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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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중세 도시의 전통적 견해
Ⅲ. 중세 도시의 양상
Ⅳ. 중세 도시의 자유와 자치
Ⅴ. 맺음말

본문내용

도시는 타유세를 면제받는 대신 국왕에게 돈을 빌려주고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그 액수는 세금보다 적었다. 파리를 위시한 주요 도시들은 왕국의 수도 및 주도가 됨으로써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중세도시는 1350년부터 커다란 변화가 진행되어 자치권을 부여받지 못했던 도시들은 자치권을 획득하며, 자치도시들은 도시민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에게 행정권을 행사하게 된다. ‘자치’의 확산이 나타난 것이다. 1559년에는 435개의 도시 가운데 43%(190개)가 자치권을 부여 받는다. 그리고 이제 시장은 단순한 행정관이 아니라 통치자(gouverneur)의 면모를 지닌다. 루이 11세가 시장 선출에 직접 개입한 것은 사실 루앙 도시법의 규정을 전국적으로 확대한 것이다. 국왕은 자기가 직접 도시를 통치하지 않고 자기의 관리를 임명했는데 국왕 관리들은 도시의 유력자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국왕의 개입은 기존의 회원호선제(cooptation)의 위장된 형태에 불과했다. 다시 말하면 도시의 자치는 위협받지 않았던 것이다. Bernad Chevalier, Les bonnes villes de France du XIVe au XVIe siecle, pp.199-204
Ⅴ. 맺음말
1000~1800년 사이에 유럽 도시들이 일직선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1300년경까지 경제와 인구의 증가에 따라 상당한 팽창을 했으나 흑사병 이후 크게 쇠퇴했고 1500년 이후 그 추세가 반전되었다. 그 후 아메리카, 아시아로의 직접 진출에 다라 상공업이 활성화되며 인구도 늘고 도시도 급성장을 하게 된다. 말하자면 유럽에서 도시가 본격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메리카의 식민지화, 아시아의 교역 활성화에 따른 17세기 이후의 산물인 것이다. 실제로 현재와 연결되는 유럽의 도시사는 17세기에 다시 시작하고 있다. G. H. Martin, " The English Borough in the Thirteenth Century", Holt, the Medieval Town, p..29. 마틴은 영구 r도시사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으나 이것은 다른 곳의 도시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도시가 성장하기 이전 즉 14~15세기까지의 유럽 중세도시들의 모습은 별로 인상적이지 못하다.
실상 규모도 작고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 중세도시들이 봉건적 체제를 해체시키고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잘 맞지 않는 주장이다. 여전히 유럽 중세도시들은 이탈리아의 경우를 제외하고 대체로 봉건적 정치체제 안에 편입되었다. 많은 도시들이 왕이나 영주로부터 받은 특허장으로 약간의 자율성을 얻으나 그것들은 아주 작은 부분적인 권리들을 규정한 것이다. 수 백 년에 걸쳐 수백 개의 특허장을 받은 도시도 있으나 그것이 도시의 완전한 자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는 경우에 따라 다르기는 하나 특허장을 도시민의 쟁취한 결과로 보지 않는 연구자들도 있다. 그것이 영주들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뿐 아니라 영주들에 의해 강요된 결과라고 보는 것이다. 강일휴, 「중세 프랑스 도시의 자치 및 농촌과의 관계」,『서양중세사연구』7, 2000. pp.76-77.
중세의 특허장에서 사용하던 자유라는 개념은 근대적인 자유의 개념과 전혀 다르다. 그것은 자의적인 지배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세금을 부분적으로 면제받는 등의 여러 경제적, 법적인 특권을 의미하는 것이다. 중세인들은 농민이건 도시민이건 영주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자의적’ 지배에서는 벗어났기 때문에 ‘자유’라고 말한 것이다. 그들은 법과 계약에 정해진 고정된 의무를 지니게 되었다. 그렇기에 인신적으로 예속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구분은 중세에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특정 세금을 면제받는 특권을 위해 어느 영주에게 예속되는 것도 흔한 일이였다. 강일휴, 앞의 글, p.78.
도시의 자치 또한 완전한 자치는 아니였다. 중세도시는 영주의 간섭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영주가 허용한 한도 내에서 스스로 시정관을 뽑고 시참사회를 구성했다. 도시는 영주의 자의적인 통치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에서 자치를 한 것이다. 또한 도시민이 시민권을 가지기 위해서는 아주 오랜 시간과 재산 등의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도시에 들어와서 1년 1일이 지나면 신분이 자유로워진다’ 앙리 피렌느, 강일휴 역,『중세 유럽의 도시』,신서원,1997. p.160.
는 널리 알려진 속설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
도시의 자치는 특히 초기 단계를 제외하고는 그 선출과 구성에서 민주적이지 않았고 일부 유력가문의 자치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도시의 자유는 있다고 해도 도시 내의 특권적인 소수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지 도시민 전체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도시의 자유가 도시민의 자유는 아닌 것이다. 도시의 자치는 중앙집권을 추진하는 절대왕정의 개입으로 위협을 받았으며 최종적으로는 시정관직이 선출직에서 매관직으로 변함으로써 크게 훼손되었다. 시민들의 민주적인 정치참여가 제한되고 과두정이 강회된 것이다. 1789년 프랑스 혁명은 도시의 시정관들을 선출직으로 전환시킴으로써 중세도시의 ‘자치’를 회복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근대 유럽의 정치적 자유는 프랑스 혁명을 비롯한 18세기 말 이후의 산물이다. 그것을 중세도시와 직접 연결시킬 수는 없다.
< 참 고 문 헌 >
○ 단행본
강철구 「역사와 이데올로기-서양 역사학의 유럽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용 의 숲, 2004.
앙리 피렌느, 강일휴 역,『중세 유럽의 도시』, 신서원, 1997.
에디트 엔넨, 안상준 역,「도시로 본 중세 유럽」, 한울, 1997.
○ 논문
강일휴 「중세 프랑스 도시의 자치 및 농촌과의 관계」,『서양중세사연구』7, 한국 서양중세사학회, 2000.
강일휴 「루이 11세 치세의 왕정과 도시」,『서양중세사연구』10, 한국서양중세사 학회, 2002.
강철구 「유럽의 중세도시와 자유」,『이화사학연구』v.30, 이화사학연구소, 2003.
김응종 「서양 중세도시의 자유와 자치-역사인가 신화인가」,『백제연구』46집, 충 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7.
  • 가격4,000
  • 페이지수19페이지
  • 등록일2012.06.15
  • 저작시기2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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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753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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