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내각의 출범과 제2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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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장면 내각의 출범과 제2공화국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장면의 생애
Ⅲ. 장면 내각의 출범
Ⅳ. 권력구조상의 특징
Ⅴ. 제2공화국의 사회상
Ⅵ. 장면 내각의 붕괴
Ⅶ. 맺음말

본문내용

30만 7,415명에서 33만 3,735명으로 약 3만 명이나 급증하였다. 교원 노조에 가입한 초, 중등학교 교원의 수는 전체 교원 수 8만3천5백73명 중 1만8천6백78명으로 약 22.3%에 이르렀다. 이렇게 정부와 사회 간에 갈등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비제도권에 있던 사회명망인사들이 국토건설본부에 참여하였다. 국토건설본부는 기획부장에 당시 시민사회의 흐름을 대표했던 ‘사상계’ 대표 장준하, 사회홍보부장에 서울대 이만갑 교수를 임명하였고 함석헌의 참여 등 비판적 재야인사가 지원하였다. <사상계>는 발행 부수가 발간 후 줄곧 5만부 선을 유지했고 4·19를 전후해서는 최고 9만 7천부까지 발행했다. 그 시절 동아, 조선, 한국 등 유력 일간지의 발행 부수가 10만에서 7~8만부 선에 머물고 있었음을 감안할 때 <사상계>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사상계>는 학생층과 지식인층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4.외교
제1공화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의 명분론과 강경외교노선에 따라 한미관계도 다소 마찰이 없지 않았으며, 한일관계 또한 반일(反日)·방일(防日)을 기본으로 하여 외교정책의 현실화가 이루어질 수 없었다. 통일문제에 있어서도 북진통일론으로 일관하다가 말기에 이르러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로 전환하였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엔을 의식한 외교정책일 뿐, 국내적으로는 여전히 북진통일 또는 '유엔 감시하의 북한만의 총선거'로써 북한을 흡수통일한다는 실지회복론(失地恢復論)이 그 기조였다. 그러나 제2공화국은 '평화적 방법에 의한 자유민주통일'의 원칙하에 유엔의 결의를 존중한다는 '평화통일론'으로 전환하였다. 미국과의 친선관계 유지로 하고 안보측면에서는 제 1공화국 이상으로 반공을 강조하였다. 또한 미국을 군사 우방국으로 삼고, 미국에 의한 원조를 더욱 증가 시키고자 하는 방향으로 대미 경제외교 전략을 세웠다. 안보와 경제원조를 조건으로 미국에 전적으로 매달리다시피 한 양상을 보여 주었던 것이다. 이 점은 특히 1961년 2월에 체결된 한미경제원조 계획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는데, 동 원조계획의 합의사항에서 미국의 계속적인 감시와 심사를 한국 정부가 아무 제한 없이 받아들일 것을 명시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1969년 말까지 약 25년 동안 71억 달러에 달하는 외국자본을 수입하였다. 이 총수입액 가운데 그 67%인 48억 달러가 미국원조를 중심으로 한 무상증여 이었으며 나머지 23억 달러가 차관·직접투자등 유상의 외자도입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부터 미국은 국제수지의 악화로 인하여 무상원조만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반도 원조정책을 펴는 대신에 무상과 유상의 원조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조정책은 전체 양적인 측면에서도 감축되었다. 한일통상문제를 한일회담으로 추진하고 싶다는 의사를 기점으로 경제적인 면에서 일본 자본 도입을 추진하려는 의사를 표명했다. 미국은 당시 대한경제원조정책을 추진해 왔는데 이것은 물론 미국의 반공정책의 일환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일회담이 소극적으로나마 추진되었었다.
Ⅵ. 장면 내각의 붕괴
제2공화국의 정치적 상황은 새로이 여당이 된 민주당의 경우 신구파 계보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하여 그 출발부터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 내각책임제하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가져야 할 장면 국무총리는 인준과정에서 소수 무소속의 도움으로 정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구파의 도전과 신파내의 소장파 의원들의 요구 사이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민주당내의 계파갈등은 구파가 양당제를 육성한다는 명분하에 분당을 선언하고 신당조직을 추진하여 1961년 2월 20일 신민당을 창당하였다. 이와는 별도로 당시 사회적인 상황도 자유당 정권의 붕괴 이후 갑작스럽게 자유로워진 분위기 속에서 무질서와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무책임한 언론의 난립과 데모만능의 사회분위기는 4·19학생혁명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정국의 표류상태로 이어졌다. 결국 정권기반의 약화와 정국 수습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표류하던 민주당의 장면 내각은 점점 그 지도력을 잃고 있었다. 사회불안이 점점 가중되자 1961년 5월 16일 국군 소장 박정희는 휘하 군인들을 이끌고 반공과 부패, 부정의 일소 및 국가재건이라는 구호를 앞세워 군사정변을 일으켜 제2공화국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Ⅶ. 맺음말
4월의 혁명으로부터 성립한 제2공화국의 치세는 1960년 8월 19일 장면 총리가 국회로부터 인준을 받은 때부터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까지 불과 9개월 정도 지속되었다. 이에 비해 장면 내각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군사정권은 30여년 이상 지속되었다. 군사정권은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민주당 정권을 부정적인 모습으로 각인시켰다. 이런 까닭에 민주당 정권은 파벌투쟁으로 시종한 부패 무능한 정권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되었다. 이 때문에 제2공화국사의 연구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정권에 대한 언급의 일부로만 취급되어 왔다. 그러나 이 시기는 민주주의 에 대한 열망이 들끓었던 시기였으며, 경제 발전에 대한 투신의 각오가 다져지던 때였다. 그리고 민족 내부에 있어서 진정한 평화와 화해에 대한 씨앗이 움터 나왔고, 새로운 국제 질서의 수립을 위한 노력이 경주 되던 시기였다. 제2공화국의 역사는 해방 이후 줄곧 이승만의 독재 정권 아래에서도 그침없이 성숙시켜 가고 있던 고상한 이념들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박정희 군사 독재 정권이 표방한 경제 발전 계획에 가장 필요한 기본적인 틀을 마련해 준 정권이었다. 장면정권은 군부에 의해 단명한 불운하고 소중한 우리 과거의 민주정권임과 동시에 그 한계로 인해 우리에게 기나긴 군부독재를 안겨준 원인이 되기도 할 것이다. 또한, 상황적으로 현재의 한국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던 당시에 대한 연구는 우리에게 주는 함의가 많을 것이다. 장면에 대한 일관적 평가가 되지 못했다는 한계는 뒤로 할 수밖에 없겠지만 장면정권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생각처럼 단순하게 과도기적 시대만으로 평가할 수 없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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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9.26
  • 저작시기2012.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69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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