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군사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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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머리말
2-1. 관등제
2-2. 관직제
2-3. 군사제
3. 맺음말
+참고

본문내용

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5부 조직과 관련시켜 보면, 각 부에는 1천 명의 군사가 배치되어 말객이 지휘하고 이들 5부의 중앙군을 대모달이 총괄 지휘한 것으로 짐작된다.
지방 군사조직은 지방 행정조직과 하나의 체계로 짜여졌다. 지방관이 곧 군관으로서 해당지역 지방군을 통솔하였던 것이다. 당과의 전쟁에서 고구려군을 지휘하였던 高延壽와 高惠眞의 관직은 최상위 지방관인 褥薩이었다. 또 무관명인 말객의 다른 이름은 郡頭였는데, 이는 군의 지방관이라는 뜻이고, 최하위 지방관인 婁肖와 百頭도 무관직인 幢主와 대응시켜 볼 수 있다.
고구려 군사훈련의 대표적인 제도는 수렵행사였다. 초기부터 고구려왕은 잦은 수렵행사를 통하여 자신의 군사적 능력도 함양하고 군사훈련도 겸하였다. 평양천도 후에는 국가적 수렵행사가 봄·가을로 정례화되었다. 봄에는 매년 3월 3일에 수렵행사가 열려 중앙군인 5부병들의 군사훈련을 겸하였다. 또 수렵행사는 溫達의 예에서 보듯이 무예가 뛰어난 자를 선발하는 인재 등용의 통로로도 기능하였다. 이러한 국가적 행사 이외에도 고구려 귀족들은 평소 수렵을 즐겨 이를 통해 말타기와 활쏘기를 연마하였다. 이는 고분벽화에 많이 보이는 수렵도에서 엿볼 수 있다.
미성년자의 교육기관인 경당도 군사훈련의 중요한 장이었다. 평민들의 자제들은 이 곳에서 글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 또 매년 초에는 대동강에서 왕의 관전 속에 두 패로 나뉘어 石戰행사를 벌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벽화에 수렵도를 비롯하여 씨름도와 手搏圖·궁사도·전투도 등이 자주 그려지는 것으로 보아 전반적으로 상무적 기풍이 융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군의 주력은 육군이었으나 수군도 상당히 강력하였다. 본격적인 수군의 활동은 고구려가 낙랑군지역을 차지한 이후로, 이 지역의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수군을 편성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광개토왕 영락 6년(396)의 백제 정벌전에서는 수군을 동원하여 한성을 공격한 적이 있고, 후기에는 고구려 수군이 황해 연안로를 장악하여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방해로 사신을 보낼 수 없다고 당에 탄원할 정도로 강성하였다.
3. 맺음말
광개토대왕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이었다. 고구려의 19대 왕으로 즉위한 그는 영락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생존시 영락대왕이라 불리워졌다. 375년(소수림왕 5)에서 413년(광개토대왕 23)이란 짧은 생애를 살면서 재위 기간인 391년에서 413년까지 그가 이룬 영토확장의 업적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만한 것이었다.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도 부왕의 활발한 정복사업을 이어받아 영토확장에 힘쓰는 등 고구려사에 있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장수왕은 반도 남쪽으로의 진출에 힘써 신라와는 죽령. 마령을 연결하는 산맥 및 속리산의 서쪽에 있는 보은의 북쪽을 획선으로 대치하였고, 백제와는 이 선을 서쪽으로 연장하여 남양만 및 아산만으로써 경계를 삼았다. 1979년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이러한 장수왕의 영토 확장 업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주는 좋은 증거라 하겠다.
참고 : 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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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8.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8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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