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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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인간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한국 가톨릭 실업인회'는 지난 봄 주교회의 정기총회의 승인을 받아 지난 22년 동안 사용해 오던 이름을 '한국 가톨릭 경제인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전문 경영인의 참여를 더욱 확대하여 한국 실업계에 가톨릭의 이념을 심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한국 경제계에 희망을 주고 활력을 불어넣는 가톨릭 경제인들이 될 수 있기를 빕니다.

'기업인', '경제인' 또는 '경영인'에 대한 일반인의 시각은 그리 곱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적 어려움이 모두 그들 탓이라고 생각합니다. 편견이라고는 하지만 정치인들과 함께 기업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을 '더러운 활동'에 종사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대중 매체 종사자들도 경제인들을 매도하고 어떻게 생각하면 장난삼아 보도하기도 합니다. 경제인들의 부도덕성을 비판합니다. 구조적인 결점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경제인을 비판합니다.

교회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배려'를 이야기하며 경제인들을 암시적으로 비판합니다. 경제인과 부자를 동일시하는 경향은 교회 안에서도 나타납니다. 경제인은 물론 교회가 특별히 보호해야 하는 사회의 '가난한 이들'에 속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성서에서 비판하는 부자와 동일시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경제인들을 성서가 암시하고 있는 '불쌍한 죄인들'로 여겨 경제인들을 당혹스럽게 합니다.

부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다음 성서의 말씀에서 비롯됩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루가18,25). 이 말씀을 들어 부자들의 구원 가능성을 배제하려는 경향을 보입니다. 그러나 다음 문장을 보면 그러한 해석이나 적용은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다음 예수님 말씀에서 희망을 보기 때문입니다.

부자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러면 구원 받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루가18,26)하고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하느님께서는 하실 수 있다."(루가18,27)하고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자도 구원하실 수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욱이 루가 복음 16장의 '약은 청지기의 비유'(1-15)는 재물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을 가능하게 합니다. 말씀을 들어봅시다. "예수께서 말씀을 계속하셨다. 그러니 잘 들어라.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재물이 없어질 때에 너희는 영접을 받으며 영원한 집으로 들어갈 것이다."(16,9). 이 말씀을 들으면 세속의 재물은 잘만 쓰면 오히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데에 더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1891년 '노동헌장'이라 불러온 교황 레오 13세의 회칙「새로운 사태」(Rerum Novarum)반포이후 한 세기에 걸쳐 많은 사회

본문내용

는 그러한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사실 어떤 이들은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무신론자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통이 왜 있는지, 또 왜 하필이면 죄 없는 사람이 고통과 시련을 겪어야 하고 죽어야 하는지 등에 대한 문제를 풀지 못한다 하여 하느님은 없다고 부인해 버리면 그야말로 그 고통과 고통 속의 인생은 무의미하게 되어 버립니다. 인생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하느님은 없고 고통만 남으니)
어려움 있을 때, 병들었을 때 하느님께 ‘도와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게 됩니다. 또 대학입학 시험 때에도 어머니들은 아들딸이 입학이 되도록 해달라고 기도 드립니다. 이런 기도는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1)만일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모든 기도를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2)또 암과 같은 불치병을 비롯하여 모든 악과 불행을 사전에 막고
(3)교통사고로 다치거나 죽는 사람도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 하느님이 해야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을 우리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는 기계와 같이 -자동판매기와 비슷한 기계와 같이- 만드는 것입니다.
(4) 또 많은 악과 불행이 인간이 짓는 죄에서 비롯되는데 -그런 악과 불행을 막으려면 인간이 죄를 지을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인간의 자유를 박탈해야 합니다. 그럼 인간은 자유로이 진리와 선을 택할 수도 없고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자유 없는 인간은 이미 인간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록 고통에 대해 설명이 안 되더라도 하느님이 있으면 왜 그런 고통을 허락하셨느냐고 넋두리라도 할 수 있고, 불평, 불만, 항의라도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많은 경우에 -직접 체험도 하고 목격하듯이, 사람들은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고, 인생을 보다 깊이 살게 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모든 선과 모든 좋은 일, 성공은 고통과 수고를 통해서 이룩됩니다.
고통 없는 인생, 아주 좋은 것 같이 보이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인생이 깊이가 있을 수 있습니까? 고통을 모르면서 자란 사람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다를 수 있으나- 남의 사정, 남의 고통을 이해할 줄 모릅니다. 이에 비해 많은 고통을 겪고 山戰水戰 다 겪은 사람은 특히 신앙 속에서 겪은 사람은 참으로 인생을 깊이 살 줄 알고, 사람을 참으로 사랑할 줄 압니다. 많은 이들이 고통은 하느님의 은혜이다라는 것을 체험으로 깨닫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합니다.
인생의 의미
이제 우리는 여러 가지 측면으로 인생의 문제를 보아왔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을 이것의 원인인 하느님의 사랑, 특히 구세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느님의 한없는 사랑을 볼 때에 우리는 인간이 무엇인지, 인생의 목적이 어디 있는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있는 실마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물질은 생명을 위해, 생명은 영을 위해, 영은 하느님을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하느님의 창조의 힘에 의한 200억년의 가까운 우주의 생성과 진화발전은 생명을 낳기 위해서, 생명체의 발전은 의식을 가진 인간을 낳기 위해서, 그리고 이 인간은 하느님과 하나되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물질적이고 생물학적이면서도 정신적, 영적 존재인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목적을 위해서나 죽고 썩음으로 물질로 환원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 향해 가기 위해서, 영원하고 무한하시며, 진선미 자체이신 하느님, 참 생명이요 빛이신 하느님과 같이 되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미래는 참으로 위대하고 원대합니다.
그 때문에 모든 인간의 존엄성은 더욱 빛납니다. 인간에게 이런 영원에로의 본성이 있다는 것은 우리들 자신의 심리를 들여다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마음속 깊이에서부터 영원과 무한, 진선미와 완전한 사랑과 불멸의 생명을 갈망하고 있는데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은 생물적 존재이기에 음식도 필요합니다. 공기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정신적, 영적 존재이기에 진리, 정의, 사랑 등 정신적 빵도 먹어야 합니다. 그것은 또 무한하고 영원해야 합니다.
무한하고 영원한 것, 이는 곧 하느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은 음식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주여, 당신은 우리를 당신께 향하여 만드셨으니 당신께 가서 쉬기까지는 영원히 평안치 못합니다.”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사랑이다.
그럼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 하느님이 절대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는 인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마음을 다하고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누구도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이웃을, 특히 가난하고 불우한 이웃, 약한 이웃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이 두 사랑은 하나의 사랑입니다. 인생의 길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끝가지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도 어느 날 사람을 모든 것에 앞서 존중하고, 어린이, 장애자, 노약자, 부녀자, 동물을 사랑할 줄 아는 선진 사회, 인간다운 인간사회, 지상낙원이 되어야 하겠습니다.(장애인을 위하고, 거리에서는 보행자를 앞세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세계화를 지향하는 오늘 이 시대에 한국의 정치인, 경제인, 지성인들이 이런 인간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이런 인간관을 기초로 한 생활가치관을 교육을 통해 심어줄 수 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습니까? 그리고 언론이 이런 인간관과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여 목탁의 역할을 한다면 하는 소망 또한 큽니다.
저는 이와 같은 사랑을 살 때 우리는 참으로 세계인이 되고, 한국은 세계에서 빛나는 큰 나라가 되며, 통일도 그 힘으로 이룩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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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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