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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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독교와 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주요 기독교 교단들의 정치적 수구성과 부패가 널리 알려지면서, 이제는 기독교에 대해 얼마간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쿨’한, 혹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태도로 인식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 역시 그런 면에 불만을 느끼고 교회를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이 글은 기독교를 정치적으로 비판하기 위한 글은 아니다. 다만 기독교와 관련한 내 의문점들을 정리하고, 가능하다면 다른 여러 사람의 조언을 구하기 위한 글일 뿐이다. 내가 느끼는 기독교의 모순만 해결된다면, 나는 언제든 기독교로 돌아갈 준비가 되어있다.

여기서 이야기할 내용들은 사실 전혀 새로운 것들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몇백년 전에 계몽사상가들이 마르고 닳도록 주장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다. 계몽 사상, 특히 그들의 기독교 비판을 깊이있게 가르치지 않는 우리 교육에서(사실 당연하다. 우리는 유럽이 아니니..) 나는 이들을 뒤늦게 접했을 뿐이다. 이 글을 읽고 일부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도 대충 짐작이 간다. 그들은 신앙은 이성으로 생기는 게 아니라거나,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교만한 자는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 조언은 죄송하지만 사양한다. 나는 나와 유사한 고민을 겪다가 신앙을 회복한 크리스천의 조언을 구한다. 그런 사람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모태신앙, 그 위험성 : 회의(懷疑)의 전사(前史)

엄밀한 의미에서 나는 모태신앙인(나면서부터 크리스천인 사람, 즉 부모님이 모두 크리스천이고 부모님 덕에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은 아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지 않으셨고, 결혼 후 얼마간은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지도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어머니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고, 나는 내가 어떤 계기로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아주 어릴 때부터 나는 교회에 다녔다는 사실이다. 내가 내 믿음을 선택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는 점에서 보면, 나는 모태신앙인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착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주일에 교회에 빠지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주일학교 행사가 있을 때면 열심히 참여했고, 교회 성경퀴즈대회 같은 것에서 입상하기도 했다. 성가대도 열심히 했다. 고등부 때는 회장을 맡기도 했다. 나의 모든 놀이문화와 여가는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나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 혹은 등록만 하고 안 나오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곧, 교회는 내가 아는 세계의 전부였다.

하지만 모태신앙인의 대부분이 그러하듯, 머리가 굵어지면서 나 역시 회의에 빠져들게 되었다. 내 신앙이 올바른 것인지 의심스러웠다. 무언가 ‘구원의 체험’이라 할만한 것도 없었고, 하나님이 내 삶에 직접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 나는 내 신앙이 ‘머리로만 믿는 신앙’, 혹은 ‘습관적 신앙’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항상 시달렸다. 가끔씩 울면서 기도해도, 감동에 젖어 찬양을 해도, 이것이 정말 내 신앙이 올바르다는 증거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 사회과학서적이라 할만한 책들을 읽게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정식 논문은 아니고, 강준만, 홍세화, 정운영 씨 등의 에세이 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우리 사회가 무언가 문제가 있다는, 무언가 잘못 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무언가 바뀌어야 했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아무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성경공부 시간에 하는 얘기들은 내 삶과 직접 관련이 없는, 한가로운 이야기들로 느껴졌다. 가슴에 와닿지 않았다.

본문내용

이 안될뿐더러, ‘잘 되면 하나님 탓, 못 되면 사탄 탓’이라는 식의 논리는 올바르지 못하다. 욥을 비난하던 친구들과 다를 게 뭔가.
성경과 윤리, 정치적 올바름
어떤 이는 또 말한다. 그래도 성경에 나쁜 말씀은 없지 않느냐고, 꼭 신앙이 아니라도 생활의 지침으로 적당하지 않느냐고. 미안하지만 이에 대한 답 역시 부정적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에는 여러 구절이 있기 때문에, 모순되는 행동들도 정당화가 가능하다. 성경의 일부 구절을 받아들일 수는 있겠지만, 왜 다른 구절은 거부하고 이 구절만 받아들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역시 나 개인의 윤리적 판단일 뿐이지 성경을 통해 정당화할 수 없다. 또한 무신론자도 얼마든지 도덕적으로 생활할 수 있다.
정치적 영역의 문제에 이르면 더욱 그렇다. 사회복지나 노동권 보장을 위해서는 사회보장이론과 정치이론, 마르크스 등이 성경보다 근거로 더 적합하다. 양성평등 내지는 동성애 문제도 성경보다는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게 더 강력하다. 성경으로 이상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반대의 주장도 얼마든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에 효과적이지 못하다.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데 있어 성경은 불필요하다.
여전히 남아있는 두려움
대부분의 교회가 보이고 있는 보수성, 아니, 차라리 극우성도 내 발걸음을 떨어뜨린 주요 원인이었다. 물론 나는 이것이 본질적으로 기독교 교리에서 유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 교회에서 보이는 특수한 현상일 뿐이다. 또, 진보적인 사역을 하시는 교회도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내 주변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이 유감일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주일 서너 시간을 교회에 바쳐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극우적 교회를 정치적으로 강화시켜주는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렇게 하여 나는 교회에 발길을 끊었다.
하지만 고백할 점이 있다. 나는 교회에 가지 않는 시간을 전혀 생산적으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다. 이전의 예배시간을 나는 이제 대부분 잠이나 기타 시덥잖은 소일거리로 날려보내고 있다. 예배를 중단한 것에 정치성도 중요한 원인이었다면 그 시간에 무언가 다른 활동을 하는 것이 올바를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끝으로, 예배는 가지 않아도 나는 기억할 수 없이 어릴 적부터 학습해온 기독교적 세계관을 완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가끔씩, 내일 종말이 온다면, 하는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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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0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79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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