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범근의 업적 및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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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차범근의 업적 및 평가>!!!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내가 지금까지 본 차범근의 평가는 극과극이다. 어떤 글에는 그를 마치 동시대에 인물인 마라도나나 루메니게에 비교를 하며 항상 어린 마테우스의 극찬인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범근은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다"가 인용된다. 그런거하면 어떤 사람들은 차범근을 거의 매도하듯 그냥 잘하는 용병일 뿐이다라고 한다. 이 후자의 경우에는 대게 논조가 차범근이 독일 키커지 선정 연간 베스트 11에도 안 들었고 또 그 당시 분데스리가가 1류리그였다는 증거도 없다고 한다.

사실 현재 우리의 차범근에 대한 평가는 그가 98년 월드컵 감독이었을 때의 모습과 그 후 축구협회와의 불화에 의해 많이 물들어있다. 02년 해설가로서 조금 언론에서의 평가가 나지기 시작하고 04년 수원이 K리그 우승하니 다시 차범근 띄우기에 나서다가 최근 수원이 다시 부진하니 또 부정적인 여론이 오르는 것 같다.

그런데 확실히 구분해야 할 것은 그의 선수시절에 대한 평가와 그 후의 감독으로의 모습이다. 오늘날의 마라도나를 생각해보자. 지난 몇년간 마라도나의 행적을 보면 갑자기 지나치게 비만이 되어 심장질환에 걸려 병원에 가고 또 약물과의 연루, 그리고 휴고 샤베스 베네주엘라 대통령과 같이 남미대륙의 극좌반미운동을 이끄는 그의 시끄러운 행적들. 그러나 사람들의 시선을 찌푸리게 할 수 있는 이 수많은 행적에도 불과하고 사람들은 일개인으로서의 마라도나와 축구 영웅으로서의 마라도나를 다르게 보며 그의 최근 행동 때문에 그의 선수생활을 평가절하 하지는 않는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이 두가지의 구분을 못하는 혹은 하기 싫어 안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한번 이렇게 적기로 했다. 선수로서의 차범근에 대한 실체는 무엇인가. 많이 읽었던 '독일 가면 한국은 몰라도 차붐은 안다'식의 평가는 이제 지겹다. 나름대로 객관적인 수치등과 수상경력들을 이용하여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 한국축구 불세출의 영웅을 평가해 보겠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나름대로 인터넷으로 조사를 하면서 느낀 것은 엄청난 자료의 부족이다. 한국 웹사이트는 물론이오 외국 웹사이트에서도 80년대 차범근 선수의 기록에 대해 나온 것을 찾기가 힘들다. 물론 축구는 팀 경기이고 결국은 골을 누가 넣었느냐 외에 기록은 남지도 않지만 차범근에 대한 기록은 그야말로 일부 열혈 팬들이 올린 것 외에는 찾기 어렵다. 감성적인 평가가 아닌 객관적인 평가를 찾기는 너무나도 어렵다. 결국 기록은 독일 사이트에서 퍼옴)

차범근은 1972년 5월 7일 만 18세의 나이로 처음 국가대표팀에 선출되어 태국에서 열린 아시안컵 이라크전에 출전한다. 그리고 2번째 A매치인 5월10일 캄보디아전에서 첫 골을 기록한다. 한국에서 그의 축구경력에 대해서는 기록이 별로 없다. 고려대에서 졸업하고 공군에 입대하였다는 것이 기록의 전부다. 하기야 그 당시 프로리그가 있는 것도 아니니 기록이 제대로 남을 수 없을 것이다.

차범근은 제대 후 1978년 독일 SV다름슈타트 98 에 입단하나 여러 문제로 단 1경기만 출전하고 다음 해 아인트락트 프랑크푸르트로 이적한다. 당시 이적료는 20만 마르크고 차범근은 연봉으로 25만 마르크를 받는다. 어느 자료에는 이 연봉을 7800만원이라 적었는데 솔직히 이 환율계산에 대해서는 신빙성이 가지 않는다. 어쨌든 확실한 것은 1980년쯤에는 독일 마르크가 미국 달러보다 값어치 있었고 지금도 25만 달러라면 큰 돈인데 지금보다 거의 30년전에 이러한 돈을 구단이 아직 검증되지 않은 선수에게 주기에는 상당히 큰 돈인 것은 틀림없다. 결국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입단 당시부터 어느 정도 기대치와 대우를 갖고 입단한 것이다.

일단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차범근의 기록은
79/80시즌 31경기 출장 12골
80/81시즌 27경기 출장 8골
81/82시즌 31경기 출장 11골
82/83시즌 33경기 출장 15골

차범근의 포지션이 타겟 맨(target man) 스타일의 스트라이커가 아닌 윙 포워드인 것을 감안하고 또 당시 독일에서는 3-5-2 내지 5-3-2 진형을 썼던 것을 생각하면 상당한 득점력인 것 같다. 사실 오늘 날에도 이 정도면 A급 선수이다.

1983년 7월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바이엘 04 레버쿠젠으로 이적료 135만 마르크에 이적한다. 그 때 연봉은 52만 6천 마르크였고 당시 연봉 톱 5에 들었다고 한다지만 이 역시 확실한 출처는 찾기 어렵다. 상당한 양의 돈은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쯤이 미국 프로야구에서 최고 선수들이 처음으로 백만불 연봉 고지에 오를 때이다. 훨씬 더 스포츠 상업화가 발전된 미국에서 그리고 경기수입료가 구단의 주 수입원이었던 당시에 축구보다 시즌이 4배나 긴 야구선수가 이 정도 연봉을 받는다면 당시 차범근의 연봉은 톱 클래스이다.

이미 레버쿠젠의 입단시 그는 나이가 만 30세이다. 축구선수로서는 이제 전성기 말년에 들어선 것이다. 레버쿠젠에서 그의 기록은
83/84시즌 34경기 출장 12골

84/85시즌 29경기 출장 10골

85/86시즌 34경기 출장 17골

86/87시즌 33경기 출장 6골

87/88시즌 25경기 출장 4골

88/89시즌 30경기 출장 3골

87/88 시즌부터는 미드필더로 출장하기 시작했다 하고 88/89시즌에는 미드필더로만 출장했다고 한다. 이미 이때는 나이가 만으로 34-35살이니 거의 모든 경기에 풀타임 출장한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쪽 기록에는 85/86시즌애 리그 MVP를 받았다고 써있는데 이것을 외국사이트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해랄드 슈마커라는 선수가 그 해 '올해의 선수상'을 받았다는 문헌도 있는데 내 생각에는 아마도 차범근 선수는 리그 선정 MVP를 받은 것이 아니라 언론사 선정 MVP를 받은 것 같다.

일단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는 한손안에 드는 공격수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차범근 현역 시절 분데스리가는 어느 정도 수준이었으며 차범근이 속해있던 팀은 어느 정도 수준인것인지 알아보자. 일단 차범근 소속팀의 분데스리가 내 성적은
78/79시즌 다름슈타트 리그18위 (강등)
79/80시즌 프랑크푸르트 리그 9위, UEFA컵 우승

80/81시즌 프랑크푸르트 리그 5위, 독일 FA컵 우승

81/82시즌 프랑크푸르트 리그 8위

82/83시즌 프랑크푸르트 리그 10위
83/84시즌 레버쿠젠 리그 7위

84/85시즌 레버쿠젠 리그 13위

85/86시즌 레버쿠젠 리그 6위

86/87시즌 레버쿠젠 리그 6위

87/88시즌 레버쿠젠 리그 8위, UEFA컵 우승

88/89시즌 레버쿠젠 리그 8위

즉 차범근은 한번도 바이에른 뮌헨이나 함부르크처럼 강팀에 속해 있지는 않았다. 단 아직 팀들의 양극화 이전이기에 스타 선수들이 최고 팀 외에도 존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 UEFA컵이 지금보다야 위상이 높았고 자국 리그에서 5,6위권 팀이 UEFA컵을 우승한다는 것에 분데스리가가 톱 레벨인 것을 짐작해 볼 수는 있으나 확신할 수는 없다.

사실 분데스리가가 1류 리그인지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70년대말에는 독일과 잉글랜드 리그가 최고 리그였다. 하지만 80년대 들어오면서 이탈리아 세리에 A가 해외선수 대거 영입으로 최강리그가 되면서 분데스리가가 유럽 내 2위에서 3위로 떨어진 것 같다. 80년대말이 되면 잉글래드 1부리그와 독일 분데스리가는 3,4위로 떨어지는 기분이다. 결국 당시 분데스리가는 지금보다는 월등히 강하지만 당대 최강의 리그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럼 여기서 결론은 지어본다. 분데스리가 내에서 차범근은 1류 선수였던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분데스리가가 당대 최고였는지는 의심할 수 있다. 차범근이 1류 팀에 가지 못했다는 것으로 그를 폄하할 수는 없다. 이미 프랑크푸르트에서 레버쿠젠으로 이적할 때 나이가 만 30살. 유럽 최고 클럽들이 그를 데려가기에 나이가 너무 많은 것이다. 결국 차범근은 당시 초일류 (마라도나, 플라티니, 루메니게 급)는 아니지만 그 바로 및 레벨에 선수인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차범근은 이 글을 쓰는 2006년 5월에 박지성, 이영표 선수보다는 몇배나 더 큰 위상을 가진 선수였다. 너무나 우리 뇌리의 전설적인 인물로 각인되어 약간 실력이 부풀려진 것은 있지만 그렇다고 그가 눈에 튀지도 않는 적당한 레벨의 선수는 아닌 것이다. 그는 스타였다. 당대 최고 스타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스타였다.

1970년대말 열약한 국내 축구 환경을 생각해보면 차범근이란 선수는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런 그를 오늘 날 그의 감독능력이 우리가 원하는 레벨 보다는 아래라고 그의 선수로서의 업적까지 평가절하하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본문내용

아닌 것이다. 그는 스타였다. 당대 최고 스타는 아니였지만 그래도 스타였다.
1970년대말 열약한 국내 축구 환경을 생각해보면 차범근이란 선수는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런 그를 오늘 날 그의 감독능력이 우리가 원하는 레벨 보다는 아래라고 그의 선수로서의 업적까지 평가절하하 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된다.
(P.S. 차범근의 기록을 보면서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다. 2002년 당시 홍명보 선수가 차범근 선수가 갖고 있는 한국 최다 A매치 출장 기록을 경신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차범근은 선수로서 A매치를 121경기 출장하였다. 그런데 그중 118경기가 1972년부터 1978년까지 출장한 경기다. 그가 독일에 진출한 1979년부터 그가 나온 경기는 단 3경기. 즉, 1986년 월드컵 본선 조별 라운드에서 출전한 3경기 뿐이다. 1980년대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이 오늘 날과 같아서 유럽에서 뛰는 선수들이 출전할 수 있었으면 차범근이 몇 경기를 나왔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의 전성기인 1979년부터 1986년 월드컵 이전까지 그가 국가대표팀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는 사실은 한국 축구, 더 나아가서는 아시아 축구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 중에 하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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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2.03.13
  • 저작시기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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