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의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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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구약의 배경

본문내용

스 2세를 유다의 분봉왕으로 삼았으며, 안티파텔을 유다의 태수로 임명했다. 그리고 안티파텔은 자기의 두 아들 중 파사엘에게는 예루살렘을, 헤롯에게는 갈릴리를 통치하게 하였다. 시이저는 주전 44년에 암살을 당했다. 그리고 힐카누스 가의 잔을 맡은 자가 주전 43년에 동료인 안티파텔을 독살함으로 힐카누스 가문과 안티파텔 가문 사이가 크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후에 힐카누스 2세가 자신의 손녀 마리암네를 헤롯과 결혼을 시킴으로 이 두 가문은 사돈간이 되었다.
2) 안티고누스 2세(주전 40-37년)
주전 40년에 카시우스가 시리아를 점령하였으나, 카시우스는 다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누스에게 참패를 당하게 되었다. 그들은 후에 시이저를 지지하고 자신을 지지하지 않았던 힐카누스 2세의 귀를 잘라 바벨론으로 추방해 버렸으며, 안티파텔의 아들인 파사엘은 자살을 하였다. 그리고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을 지지해 준 안티고누스 2세를 왕으로 세웠다.
3) 헤롯 대왕(주전 37-4년)
이때에 헤롯은 로마로 도망을 하였고, 후에 그는 로마의 도움을 받아 유다의 왕이 되었다. 이로써 약 100여년간의 하스모니안 통치가 종결되었다. 헤롯은 이두메아인(에돔인)으로서 머리가 비상한 책략가였고, 잔인한 독재자였다. 그는 주전 31년까지는 안토니우스를 지지하였으나 옥타비아누스가 정권 다툼에서 승리하게 되자 그에게 찾아가서 왕관을 벗어들고 자신을 처벌해 달라고 자청하였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헤롯을 용서하고 그에게 왕관을 씌워 주었다.
가. 통치 초기-권력 기반 마련을 위한 피의 숙청-
자신의 세력을 굳히기 위해 왕족인 아내와 장모, 동서, 그리고 힐카누스 2세까지 처형시킴.
나. 통치 중기-건축 사업-
수많은 건축 공사를 함. 그는 황제 신전, 극장, 경기장, 체육관, 목욕탕, 그리고 새 도시를 건축하였으며, 예루살렘을 그리스-로마식으로 바꾸었다. 그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성전을 건축하였으며(주전 20-주후 63년), 사마리아를 재건하여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이름을 따서 세바스테라 불렀고, 가이사랴에 항구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요새와 왕궁을 건축하였다. 그러나 그는 헬라주의자들만 요직에 앉힘으로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샀다.
다. 통치 말기
자기의 아들을 모두 죽임(주전 7년). 주전 4년에 여리고에서 죽음을 당함. 마태는 바로 이 헤롯 때에 아기 예수께서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고 하였다(마 2:1).
라. 헤롯의 아들과 손자들
헤롯이 죽은 뒤에 그의 유언에 따라 유대 영토는 셋으로 분할되어 세 아들에게 나누어졌 다. 그리하여 아켈라오는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 빌립은 북동쪽, 안디바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리게 되었다.
가) 아켈라오(남쪽-폭정으로 폐위되고 총독이 통치하게 됨)
그는 분봉왕이란 칭호를 가지고 팔레스틴의 남쪽 지역을 9년동안 다스렸으며, 이 기간 동 안 그는 잔인하고 권력에 대한 지나친 욕망으로 폭정을 하였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유대와 사마리아 대표들은 아구스도 황제를 찾아가 그의 잔인성과 권력욕을 고소하여 그의 파면을 요구하였다. 그 결과 아구스도 황제는 그가 오랜 통치가 대규모의 반란을 야기시킬 것을 염려하여 6년에 그를 파면하고 추방하였다. 그 결과 6년에 그의 영토는 로마의 총독에게 돌려지게 되었다.
나) 빌립(북동쪽 지역)
그는 북동쪽 지역을 다스렸다. 그는 요단 동쪽 상류 지역에 파네이온을 재 설립, 확장하여 수도로 만들고 가이사 황제를 존경하는 뜻으로 "가이사랴"라고 불렀는데, 지중해 해안에 있는 또 하나의 "가이사랴"와 구분하기 위해서 이를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렀다. 그는 중용을 취한 관대하고 정직한 통치자로 헤롯의 아들 가운데 가장 온순한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그의 생애 중에 이 영토에서 적들에게 해를 입지 않고 안전하게 활동하실 수 있었다.
다) 안디바(갈릴리와 베뢰아)
그는 갈릴리와 베뢰아 지방을 다스렸다. 신약 성경에 가장 잘 알려진 안디바는 헤롯의 아 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 아버지의 충실한 아들이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여우"라고 부르셨다(눅 13:32). 그는 그의 아버지 헤롯 1세처럼 헬라 문화의 장려자이며, 위대한 건설가였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갈릴리 바다 서해안에 있는 디베랴 도성이었다. 이것은 그가 황제 디베료(22년)를 기념하여 명명한 것이었다. 그는 아라비아 아레타스 왕의 딸인 나바티안과 결혼을 하였다. 그러나 후에 형제인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반하여 청혼을 하였고, 결국 그는 본부인을 내어쫓고 형제의 아내를 빼앗아 재혼을 하게 되었다.
세례 요한은 이러한 그를 책망하다가 투옥되었다. 헤로디아는 왕의 생일에 전 남편인 빌립에게서 난 딸 살로메를 춤을 추게 하였다. 안디바는 그녀의 춤을 보고 너무 기뻐서 그녀에게 무엇이든지 요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뜻밖에도 그 어미의 지시대로 세례 요한의 머리를 요구하였다. 그리고 이를 안디바가 승낙함으로 세례 요한은 죽임을 당했다(막 10:11).
자기 딸이 강제 이혼 당한 것에 분노를 느낀 아레스터 왕은 기회를 보다가 36년에 베뢰아 를 침공하여 안디바의 군대를 쳤다. 이에 39년에 안디바는 로마에 청원하여 더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로마로 갔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그립바 1세(헤롯 1세가 죽인 아리스토 불루스의 아들)가 먼저 안디바의 부정을 로마에 고발하였고, 이로 인해 로마 황제는 안디바를 분봉왕 자리에서 내쫓았으며, 그 대신 아그립바 1세를 그 자리에 앉혔다.
라) 아그립바 1세와 아그립바 2세
아그립바 1세는 야고보를 죽였으며(행 12:1-3), 베드로를 체포하였고 초대교회의 여러 지도 자들을 괴롭혔으며 44년에 죽었다. 그 뒤를 이어 17세밖에 안된 아그립바 2세(행 25장)가 즉위하였으며, 그의 연소함으로 인해 이때부터 이 지역은 로마의 영토나 다름없이 지배를 받았다. 66년에 이 지역에서 큰 반란이 일어났으나 70년까지 정권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70년 봄에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마침내 예루살렘 성은 무너지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성전을 중심으로 하던 유대교는 종말을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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