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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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음악 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조선전기의 음악

 1) 조선전기의 왕립음악기관
 2) 조선전기의 아악정비
  (1) 신악창제
  (2) 율관 및 악기제작
  (3) 세종조의 아악제정과 정비
 3) 조선전기의 악서와 기보법.

2. 조선후기의 음악

 1) 궁중음악의 변화
 2) 민간음악의 확대
  (1) 중인음악의 출연과 확대
   ① 가곡의 발달
   ② 영산회상의 발달
   ③ 가사와 시조
  (2) 세악수(細樂手)의 음악
  (3) 판소리 및 잡가의 형성

Ⅲ.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있었다. 그래서 궁중이나 관아의 한 부서로 정부 행사에서 연주를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중에서 벌어지는 행사에 참여하여 보수를 받는 이중적 기능을 지녔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그런 의미에서 세악수는 장악원 악공과 창우집단을 비롯한 민간연예인의 중간 존재적 음악가였다.
세악수는 주로 삼현육각(三絃六角) 피리 2, 대금 1, 해금 1, 북 1, 장구 1
편성이었고, 연주곡목은 중인음악의 연주곡목, 즉 영산회상 가곡 반주 자진한잎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왕의 행차,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사연(賜宴)의 사악(賜樂), 종친이나 대신의 저택, 문인들의 모임, 시종별감이나 한량이 기녀를 동반해서 벌이는 잔치등에서 활동하였다.
세악수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시켰다. 즉, 전란 이후 쇠퇴한 장악원의 활동을 도와 궁중음악의 어려움을 보완해주고, 민간의 도시 생활수준이 높아지자 도시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돈벌이도 하는 일종의 틈새 시장의 산물이다. 이처럼 세악수의 등장은 장악원이 중심인 조선 개국 이래의 궁중음악 체제가 붕괴하고 있음을 뜻한다. 이 세악수는 조선조 후기 중인음악의 전개에 큰 공헌을 한 것으로 보인다.
(3) 판소리 및 잡가의 형성
조선 후기 서민음악의 최고봉은 판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판소리의 발생은 숙종 시대로 보는 설과 다소 막연하게 영조 이전으로 보는 설이 있다. 그러나 문헌상으로 가장 오랜 기록은 유진한의 『만화집』(1754) 춘향가이다. 18세기 영정조 시대는 정치적으로 안정된 시기였고, 또한 이앙법의 보급으로 벼의 수확량이 늘어 농민들의 생활이 한결 나아진 때였다. 이러한 생활의 여유는 서민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욕구를 해결할 매체가 필요하였던 바, 이 때 나타난 것이 판소리라 하겠다.
한때 ‘타령’ 또는 ‘잡가’라고 불렸던 판소리는 광대 한 사람이 소리와 말(아니리)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극 음악이다.
19세기 중엽 송만재의 『관우회』에는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끼타령, 적벽가, 배비장전, 강릉매화타령, 옹고집전,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무숙이타령, 가짜신선타령 등 12마당의 판소리 곡이 형성되었다.
19세기 후반에 이유원의 『가오고략(嘉梧藁略)』에 의하면, 앞서 말한 12마당 중에서 그 내용이 황당무계하다고 여겨진 강릉매화타령, 옹고전집, 변강쇠타령, 장끼타령, 무숙이타령, 가짜신선타령 등이 빠지게 되며,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사설집』에서는 이 중에서 <배비장전>과 <장끼타령>을 제외한 6마당을 실었다.
1933년 이선유가 판소리를 정리한 『오가전집』에서는 신재효의 6마당 중 내용이 상스러운 <변강쇠타령>을 빼고, 현재와 같은 5마당의 소리만을 수록하였다.
판소리의 곡수가 점차 줄어드는 동안 판소리의 사설은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틀린 부분은 고치고, 판소리의 청중이었던 지식층에 의하여 새로운 내용이 첨가되는 양상을 보였다. 따라서 12마당의 판소리 중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춘향가>의 대본이 유식한 문자를 가장 많이 담고 있어 곡의 분량이 가장 많고, 따라서 이본(異本)가장 많다는 것은 판소리의 사설이 여러 가객의 손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판소리의 음악도 역시 사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러 사람에 의하여 집대성되었다. 즉, 판소리의 음악은 여러 명창들이 각기 고유한 더늠(창작)을 첨가하여 나감으로써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극음악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판소리의 이러한 더늠 대목은 비록 악보로 기록된 것은 아니나 구젠에 의하여 그 창작자와 음악내용을 알 수 있게 한다.
잡가는 19세기에 음악적 틀을 갖추었다. 조선 말기에 공예인(工藝人)·상인(商人)·기녀(妓女) 들이 즐겨 불렀다. 잡가는 사계축(四契軸:지금의 서울역에서 만리동 고개 및 청파동에 이르는 지역에 살던 남자 소리꾼들)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고 한다. 12잡가는 알려진 긴 잡가와 빠른 휘모리 잡가가 주류를 이룬다.
원래는 유산가(遊山歌)·적벽가(赤壁歌)·제비가·소춘향가(小春香歌)·선유가(船遊歌)·집장가·형장가(刑杖歌)·평양가(平壤歌) 등 8곡인 팔잡가(八雜歌)뿐이던 것을, 정가(正歌)인 12가사(十二歌詞)에 준하기 위하여, 나중에 달거리[月令歌]·십장가(十杖歌)·출인가(出引歌)·방물가(方物歌) 등 소위 잡잡가(雜雜歌) 4곡을 더해 12곡으로 만든 것이 12잡가이며, 휘모리 잡가는 <만학천봉>, <곰보타령>, <병정타령>, <맹꽁이타령>, <한잔 부어라>, <순검타령>등이 있다.
서울지역에는 <놀량>, <앞산타령>, <윗산타령>, <자진 산타령>으로 이루어진 산타령이 널리 불렸다. 이 노래들이 언제부터 이 지역에서 애창되어 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오늘날 추정되기로는 조선 말엽 서울의 소리꾼들에 의해 노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밖에도 민요, 시나위와 산조, 굿, 농악, 탈춤 등 민간 음악의 확대가 비약적으로 이루어졌다.
Ⅲ. 결론
음악은 시대를 반영한다. 시대와 사상에 따라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음악은 변화하고 발전한다.
조선시대의 음악은 성리학을 국가이념으로 삼았기 때문에 음악 또한 오례의(五禮儀)에 반영된 음악을 추구하였다. 특히 세종조와 세조조에 이르러 궁중음악이 발달하게 되고, 악기와 악보를 제정비하고, 자주적인 기보법을 창안함으로써 많은 발달을 꾀했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을 겪은 후부터 실학사상이 대두되면서 양반사회가 몰락하고 중인계급층이 부상하면서 궁중음악은 쇠퇴하게 되고, 이와 대조적으로 민간음악이 형성되고 발달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알고 누리는 음악들은 대체적으로 조선 후기에 형성된 것들이 많이 있다. 공연장이나 매스컴에서 보통 볼 수 있는 전통음악은 판소리나 굿, 민요 같은 것들이다. 그 만큼 조선시대에 형성된 음악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음악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는 뿌리를 찾는 지속적인 연구와 이해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송방송, “증보 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송방송, “조선조음악사 연구”, 민속원, 2001.
장사훈, “한국음악사”, 정음사, 1984.
전인평, “새로운 한국음악사”, 현대음악출판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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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1.09
  • 저작시기2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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