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희에 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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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승희에 대한 연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최승희의 생애
3. 최승희의 예술세계
 1)이시이바꾸(石井漠)
 2)한성준(韓成俊)
 3)매란방(梅蘭芳)
 4)최승희의 예술작품
4. 최승희에 대한 평가
 1) 긍정적 평가
 2) 일본 문학 속의 최승희에 대한 평가
  ① 소설속 주인공으로의 최승희
  ② 일본문화의 뿌리로 무한한 가능성을 내재한 예술
 3) 부정적 평가
5. 맺음말

본문내용

일본으로 건너가 石井漠
과 다시 손잡다. 도쿄 일일신문사의 주최로 열리는 근대 일본 명류무용가 대회에 출연. 그해 10월 石井漠무용연구소의 발표회 때 『희망을 안고』,『에헤라 노아라』등 두 가지 작품을 선보여 인기를 갖다. 동 12월 시사 신문사 주최로 전 일본 일류무용가를 총망라한 1933년 맞이 무용제에 참가하다.
* 1936년 최승희의 자서전이 일본 改造社에서 출판되고, 그것을 토대로하여 찍어진 최승희 자전적 영화 『半島의 舞姬』가 4월 8일부터 5일간 서울 中央館에서 상영되다.
* 1937년 3월 19일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숙녀회 주최, 경성일보사·매일신보사 공동후원으로 최승희 渡歐 고별공연회가 일전 부민관에서 공연된 이래 두 번째로 부민관대강당에서 열리다. 이때의 수입금은 전부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전문과 증설을 위한 경비로 헌금되다.
이후 4월 3일 사리원, 4일 연안, 5일 개성, 6일 수원 등지에서 최승희 후원회 주최, 천일약방 후원으로 순회공연이 있었다.
최승희의 유럽 공연은 4년 여 동안이었고, 1940년 12월 6일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함으로써 그녀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명성을 떨친 황금기는 끝났다. 그 이후 40년대를 통틀어 최승희의 공연은 거의 지지부진할 정도였고, 일본·조선을 오가면서 고작해야 전시(제 2차 세계대전) 하의 일본군 위문공연, 만주·몽고·중국의 순회공연에서 그녀 나름대로의 무용공연을 가졌으나 특출한 창작 작품이 나온 바도 없었고, 일본을 나의 조국이라고 왕왕 떠들면서 다니는 최승희는 이시기(1941~1945년 해방 직전까지)에 조선무용, 중국무용, 인도무용, 일본무용을 혼합하여 ‘동방무용’이라 말하고 그것을 일본의 고전 춤 ‘노(能)’ 선율에 따라 춤을 추는 등, 이제는 무용인으로서의 자격을 잃은듯한 행위를 수십 차례나 거듭하였다. 글도 간간히 쓰긴 했으나 일본이 나의 조국이라는 그녀의 황국식민화를 떠받드는 그 추태로 일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최승희의 활동상황(특히 일제말기)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일부 최승희를 맹목적으로 추앙하는 사람들이 최승희의 당시 상황을 제 나름대로 추측, 오도하면서 최승희에 대해 언급하기를 이렇게들 말하고 있다. “그녀는 황국 식민되기를 꺼려 일본을 탈출하여 중국 땅에 몸을 숨기면서 옛 향수에 젖어 전성기 시대의 영화로웠던 그녀 자신의 춤을 그곳 사람들(교포, 또는 중국인) 앞에서 선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최승희가 이렇게 친일하기를 거부했다는 넌센스와 같은 낭설은 요즘 따라 항간에 자자하게 떠도는 소문이다. 우리는 뜨내기와 같은 이러한 루머를 믿으려 하지 말아야 한다. 송수남 엮음, 『한국 근대춤 인물사(Ⅰ)』, 현대미학사, 史料를 통해 본 崔承喜의 국내 무용활동, 김종옥
5. 맺음말
최승희는 일평생 무용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으로 연구하고 탐구한 무용가이다. 최승희의 명작 중에는 조선의 전통을 변용적으로 창조한 것들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예술인생 전반기 일제강점기 소품위주의 전통 재창조 작업은 후반기 월북 이후 이른바, 민족무용극이라는 대작의 형태로 변이되었다. 최승희의 전통 수용에 있어 또 한가지 주목할 것은 전통의 재창조를 세계화의 전략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유럽과 미국 공연에서 세계인이 관심 갖고 주목한 것은 바로 한국적 정서와 미학에 바탕 한 우리 춤의 독특한 메소드를 사용한 조선 춤 이었다. 한때 월북했다는 이유로 존재 자체가 희석되고 평가 절하되었던 최승희가 부활한지도 10여년의 세월이 지났다. 베일에 싸여 있던 최승희는 이제 한국 춤을 근대의 반석위에 올려놓은 신화적인 인물로 부상되었다. 또한 최승희는 일본 사람들의 마음속에 ‘조선의 혼’을 강하게 심어준 가능성의 인물로 그려져 있다. 그녀의 춤을 본 많은 일본 문화인들은 그녀의 춤 속에 담긴 한국민족의 내음과 예술적 향기를 발견하고 이를 칭찬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으며, 그녀의 춤을 통해 ‘일본 문화의 뿌리’, ‘일본문화의 원류’를 발견했음을 감추지 않고 있다. 당시 그녀는 피압박민족이 안고 있는 슬픔을 춤을 통해서 표현했고 이를 극복하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오카모토 다로는 그녀의 춤에서 공간성을 발견하고 있으며 마치 “맑은 하늘을 보듯 상쾌하고 가볍게 공간을 가르고 달리는 우아한, 그 점은 중국무용의 세련됨과 비슷하다. 좀 더 스토리 한 감각이 있다” 『일본 지식인의 한국관』,『문학사상』,1981년 8월호 참조
고 평한 바 있다. 이처럼 일본 작가들이 최승희의 춤 속에 내재된 탁월한 예술성에 찬탄하면서, 그녀만이 가진 ‘민족’과 나아가 여기서 일본문화와 동양문화의 가능성을 확인하고 있다는 점은 일본 문학 속의 또 하나의 한국인상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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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改造」,1940년 2月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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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2.17
  • 저작시기20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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