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보고서 - 독일 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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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루터 보고서 - 독일 농민전쟁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독일의 경제적 상황과 사회계급들
Ⅲ. 주요 반대파 집단들과 루터와 뮌쩌
Ⅳ. 독일농민전쟁의 배경
Ⅴ. 농민전쟁의 사상적 배경
Ⅵ. 농민봉기의 변화와 농민전쟁의 시작
Ⅶ. 루터의 농민전쟁에 대한 입장
Ⅷ. 농민전쟁의 요구사항
Ⅸ. 농민전쟁의 결과
Ⅹ. 농민전쟁의 의의
참고문헌

본문내용

Erasmus)와 결별했던 Luther는 Zwingli파와도 결별한다. 점점 Lutherism은 한정된 교의 지역 안에서 도그마(dogman)가 된다. Luther개혁의 보수성은 멜랑크톤이 \"카톨릭적 바탕에...\"라고 언급한데서 그들의 보수성을 잘 알 수 있다. Luther는 슈말칼덴전쟁직전인 1546년에 죽었다.
엘베강 동쪽 지역에서는 융커(Junker들에 의한 대농장(Gutsherrschaft:농장영주제, 서유럽의 일반적인 장원은 독일어로 Grundherrschaft라 불린다)제도 강화되어 곡물수출위주로 나간다. 이러한 대농장제도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15세기부터 서서히 진행되던 시장권의 통일은 1834년(독일 관세동맹성립)까지 이루어지지 못한다. 대농장제도의 성립으로 여러 군데에 경제중심지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동부독일(현재 대부분 폴란드영토로 되어 있음)에서는 또한 농민분해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는 자본주의로 이행에 필요한 전제조건이 융커계급에 의해 저지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농촌-특히 동부독일-에는 봉건적인 속박이 그대로 남게 된다. 수공업에서도 길드(Zunft)의 여러 제한조치가 그대로 남게 되었다. 경제적이나 법적으로 자유로운 임노동자의 계급형성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자본주의의 원시적, 본원적 축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좌파사가들의 주장대로라면) 초기 부르주아혁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부르주아가 혁명에 성공했더라면 부르주아의 성장에 봉건체제는 낡고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하기 때문에 없었을 것이고, 없애야 하기 때문이다. 1555년 이후에도 독일의 종교적 분열은 계속되었고, 반동권력에 의해 상황은 어려워지기만 한다.
이처럼 독일의 농민 전쟁은 중세 말기, 종교개혁의 앞에 서있던 루터의 영향을 받아서 일어났다. 그러나 루터가 요구하던 종교개혁과 그를 생각을 따라서 일어났던 농민전쟁은 서로 달랐고 이들은 서로가 엇갈린 길을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농민 전쟁 이후 루터의 종교 개혁은 제후들의 지원 하에 계속되었고 그 대립 양상은 루터파의 제후 대 교황과 황제의 싸움으로 나타났고 이후 신구 제후간의 투쟁인 슈말칼덴 전쟁(1546~47)을 겪게 된다.
Ⅹ. 농민전쟁의 의의
농민전쟁의 결과로 가장 고통을 겪은 계급은 성직자였다. 그들의 수도원 재산은 불타버렸고, 그들의 보물은 약탈되어 외국에 판매되든가 용해되어버렸으며, 그들의 보물은 약탈되어 외국에 판매되든가 용해되어버렸으며, 그들이 저축한 것은 소비되어버렸다. 그들은 어느 곳에서도 저항할 힘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으며, 동시에 인민의 오랜 증오의 모든 중압은 그들에게 가장 무겁게 떨어졌다. 다른 여러 신분들, 즉 제후, 귀족, 중간계급은 증오받는 고위성직자들의 고통 속에서 비밀스러운 기쁨조차 경험하곤 했다. 농민전쟁은 교회재산을 농민을 위해 세속화시키는 것을 유행으로 만들었다. 세속제후와, 어느 정도까지는 도시도 이 세속화를 그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하고자 결심했으며, 곧 프로테스탄트 나라들에서 고위성직자의 소유령은 제후나 문벌의 수중으로 들어가 버렸다. 성직제후의 힘과 권위도 침해되었으며, 세속제후는 인민의 증오를 이 방면으로 어떻게 이용할지를 깨달았다. 그리하여 이미 본 바와 같이, 풀다의 수도원장은 헤쎈의 필립에 대한 봉주로부터 그 가신의 지위로 격하되었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유일한 이득자는 제후였다. 독일의 공업 · 상업 · 농업이 불충분하게 발전했기 때문에 독일인이 국민으로서 중앙집권화되는 것은 불가능했고, 단지 국지적이고 영방적인 중앙집권화만이 허락되었다. 따라서 이 분권화의 내부에서 중앙집권화를 대표하는 제후야말로 현존의 사회적 · 정치적 상황 내에서의 모든 변화로부터 이익을 얻는 유일한 계급이었음은 이 서술의 처음부분에서부터 본 바이다. 당시 독일의 발전정도는 극히 낮았으며 또한 지방에 따라 극히 상이했기 때문에 세속제후국과 더불어 성직제후의 주권국 및 도시공화국, 주권을 갖는 백작이나 남작도 그 존립이 가능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발전은 비록 느리고 연약하기는 했지만, 끊임없이 영방적 중앙집권화, 즉 모든 제국직참신분을 제후 밑에 종속시키는 방향으로 진전되었다. 따라서 농민전쟁이 끝났을 때 제후만이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경쟁자인 성직자, 귀족, 도시가 약체화된 것에 의해 상대적인 이득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수집한 전쟁의 노획물을 통해 절대적으로도 이득을 얻었다. 교회령은 그들의 뜻대로 세속화되었다. 일부 귀족은 반쯤 혹은 완전히 몰락하여 그들의 영지에 몸을 맡기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한 도시와 농민계급에게 부과된 배상금은 그들의 금고로 유입되었다. 거기에다 이 금고는, 수많은 도시특권이 폐지되었기 때문에, 재정조작을 훨씬 광범하게 행할 여지를 얻었다. 독일의 분권화가 광범해지고 강화된 것, 이것은 농민전쟁의 중요한 결과이지만, 동시에 이러한 독일의 분권화야말로 농민전쟁 실패의 원인이기도 하였다.
1525년의 혁명에서 이익을 얻은 것은 누구인가? 제후이다. 1525년의 제후의 배후에는 도시의 하층 중간계급이 있었으며, 그들은 조세의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1525년 혁명은 독일의 지방적인 사건이었다. 독일인들이 자신들의 농민전쟁을 일으켰을 때, 영국인, 프랑스인, 보헤미아인, 헝가리인들은 이미 농민전쟁을 끝내고 있었다. 만약 독일이 분열되었다면, 유럽은 훨씬 더 분열되어 있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하여, 그것의 동인은 하나의 개별적 나라라는 협소한 공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지구의 1/4에 국한 된 것도 아니었다. 사실 이 혁명의 무대였던 나라들은 그것을 발생시키는 데 가장 소극적이었다. 그들은 다소간 무의식적인, 스스로의 의지를 갖지 않는 원료였다. 농민전쟁의 의의는 현존하는 사회상태 하에서 소외된 힘으로서 우리에게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들 자신의 운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고문헌
메리 플브룩『분열과 통일의 독일사』개마고원, 2000
김영한「독일농민전쟁과 천년왕국신앙」『역사학보』VOL 153
하겐 슐체 『새로 쓴 독일 역사』 |반성완 역 |지와사랑
손규태 『마르틴 루터의 신학사상과 윤리』 대한기독교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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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4.14
  • 저작시기2012.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39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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