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 시대의 양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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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송나라 시대의 양명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 론

- 연구의 목적



Ⅱ. 본 론


一. 前 三 變 - 學 三 變

- 學三變 과 五溺

- 세 번의 좌절기



二. 後 三 變 - 敎 三 變

- 格物致知 와 知行合一

- 靜 坐

- 致 良 知



Ⅲ. 결 론

본문내용

므로 치양지는 학문의 큰 두뇌(요체)이다.……대개 묻고 배우는 공부는 단지 주의나 요체를 올바르게 하기만 하면 된다. 만일 주의 요체가 오로지 치양지를 추구하는 것이라면 많이 듣고 많이 보는 것도 치양지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대개 일상 속에서 '보고 들으며 일과 사람을 대하는' 일들은 천만 가지의 가닥이 있지만 양지의 발용 유행이 아닌 것이 없다. 보고 들으며 일과 사람을 대하는 일들을 제외하고서는 확충할 양지도 존재하지 않는다.『全書』, 권2, 64p
이처럼 양지 그 자체는 견문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지만, 양지를 확충하기 위해서는 여러 활동을 통해야만 한다고 왕양명은 설명한다.
③ 양지의 실천적 측면 - 지행합일과의 비교
왕양명의 사상은 지행합일(知行合一)설에서 말했던 것처럼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한다. 따라서 그는 치양지설에 있어서도, '양지에 의거해서 실행한다'는 점을 더 강조했다. 왕양명에 따르면 선을 알고 불선을 아는 것이 양지이며, 선을 아는 지知를 확충시켜 이를 실행해야 치지致知(치양지)이다.
치양지 설은 지知와 행行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예전에 제기했던 지행합일설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왕양명은 지행합일설에서, 지知와 행行이 있을 때 이 둘은 본체가 합일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효도'를 안다(知)고 말하기 위해서는 효도하는 '방법'만을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방법만 알면 지知가 아니고, 효도를 '실제로 행동에 옮겨야' 비로소 지知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사람들이 실천을 하도록 만들기 위해 이러한 지知의 개념을 주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치양지 설에서는 양지를 누구나 본래부터 타고나는 것이라 설명했는데, 이를 '실천에 옮기지 않으면 양지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지행합일설을 이야기할 때와는 달리,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본체가 하나라는 것보다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공부를 합일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지행합일 이론에 대해서는 우리가 단지 입으로만 말했을 뿐 언제 지행을 합일시킨 적이 있던가?"『全書』, 권5, 108p
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점을 강조한다. 왕양명은 양지는 옳고 그름을 아는 것으로서 명백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그 양지를 발현시켜서 실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말했다.(『全書』 권3)
"성인이 나면서부터 알고 편안히 행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무슨 공부가 필요하겠습니까?"라고 물으니, 선생께서는 "지행 두 글자가 곧 공부이다. 다만 깊이와 어려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양지는 원래 정정명명하다. 예컨대 효도를 하려는 경우 나면서 알고 편안히 행하는 이들은 다만 이 양지에 따라 실제로 충실하게 효도를 다할 따름이고, 배워서 알고 좋다고 생각해서 행하는 이들은 다만 때때로 성찰하여 자각하고 이 양지를 따라서 효를 다하고자 노력하는 것일 따름이다"라고 하셨다. 『全書』, 권3, 80p
이처럼 왕양명이 치양지 설을 제기한 이후, 그가 이전에 제기했던 사상적 개념들은 치양지설의 체계에 맞춰 조금씩 조정을 거치게 된다.
④ 치양지 공부의 완성 - 격물(格物)에서 치지(致知)로.
담약수湛若水는 왕양명 사상의 발전 과정을 서술하면서 "양명공陽明公은 처음에는 격물설을 위주로 하였고 뒤에는 양지설을 위주로 하였다"『全書』, 권37, 514p
라고 말했다. 격물(格物)은 '잘못된 일, 잘못된 마음을 바로잡음'을 뜻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소극적인 의미의 치양지 공부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치양지(致良知, 이는 곧 致知를 말함)는 '양지를 확충하여 완전하게 만듦'을 뜻한다. 이는 곧 적극적인 의미의 치양지 공부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왕양명은 그의 말년에 치양지 설을 제기함으로써 이전까지의 그의 사상을 집대성하였다. 치양지 설은 왕양명이 영왕 주신호의 반란, 그리고 장충과 허충태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겪은 개인적인 경험에서 요구된 현실적인 필요성이 그 자신의 학문적 탐구와 어우러져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Ⅲ. 결 론
지금까지 전삼변과 후삼변 개념을 통해 왕양명의 사상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살펴보았다. 젊은 시절 왕양명은 주자의 공부에 실망하고 과거에 낙방하는 등의 방황을 거치면서 몇 차례 사상이 변화하였고, 이후 관직에 올라와 좌천되고, 다시 등용되고, 전국 각지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가르치는 방법이 변화하고 종국에는 치양지 사상으로 정리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왕양명의 사상이 정확히 용장에 좌천되기 이전에 세 차례 변화되었고 그 이후에 다시 세 차례 변화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기에 대한 이유를 살펴보면, 첫째 실제로 왕양명은 20대에 불교와 도교를 공부하면서도 주자학의 방법을 택하기도 했고, 과거에 합격한 이후에도 격물론에 대해서 완전히 의심을 풀 수 없었다. 둘째, 교삼변 시기의 변화는 사상적인 변화가 이루어 졌다기 보다는 ‘良知’의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현실적 필요에 의해 보완, 강화 시키는 일련의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근거로서 왕양명은 주자의 지선후행론에 공허함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 당시 백성, 학자들을 대상으로 지행합일의 가르침을 제시하였고, 관리로서 승승장구 하던 시기에 온 백성을 대상으로 지행합일을 실천 할 수 있는 정좌의 가르침을 통해 여러 제도적인 수단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혼란이 거듭되는 현실을 보면서 그 동안의 가르침에 현실적 한계를 느끼고 이를 극복하고 대응할 수 있는 초월적인 ‘치양지’의 가르침을 통해 그의 사상적 체계를 완성해 나갔던 것이다.
그의 사상을 종합하여 평가해 보면 ‘양지’의 개념을 바탕으로 그가 살았던 시대의 현실적 요구에 의해 내적인 갈등과 반성을 겪으면서 발전된 사상체계라고 할 수 있다. 즉 양명학은 단지 당시의 시대 상황이 낳은 산물, 또는 주자학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산물(물론 이 두 요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 또한 가르침에 전개 과정 속에서 하나의 틀을 제공했던 지행합일에 대한 그의 관심이 치양지로 이르는 양명학의 사상적 완성에 기여한 바가 컸었다는 사실을 유추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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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5.10
  • 저작시기2013.5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44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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