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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대중화, 미국책임,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남로당 무장봉기, 9연대 작전,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초토화작전, 귀순평화회담,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 진상규명운동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대중화

Ⅲ.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미국책임

Ⅳ.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남로당 무장봉기
1. 목적
2. 준비 및 봉기일시
3. 병력운용
1) 경비대 제9연대
2) 유격대 및 자위대(400명)
3) 특무원(20명)

Ⅴ.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9연대 작전

Ⅵ.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초토화작전
1. 육․해․공 합동토벌기
2. 선무활동기

Ⅶ.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귀순평화회담

Ⅷ. 제주 4 3항쟁(제주 4 3사건)의 진상규명운동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다큐멘터리는 진실규명의 한 운동의 방향에서부터 남은 과제의 구체적 해결을 요구하는 또 다른 영상운동으로 전환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의 내용이 달라지면서 국가폭력의 피해자로 비취어졌던 제주인의 이미지도 변화하고 있다. 「순이 삼촌』을 쓴 현기영 작가의 강한 의지와 작품의 우수성을 필두로 용기있고 놀라운 예술적 재능까지 지닌 제주인이 부각된다. 또한 제주신문, 제민일보, 방송사, 민예총, 제주 43 연구소 등은 열악한 환경과 억압적 분위기에서도 끈질기게 진상규명을 위하여 노력해 온 항쟁인으로 형상화된다. 기록필름이나 당시 사건을 설명할 때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등장하나 규명운동을 하는 제주인은 투쟁가로 이미지화된다. 이러한 변화는 제주인의 긍정적인 정체성 형성의 한 부분으로 관객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표현방법으로는 기록필름, 주민들의 증언, 전문가 인터뷰, 각 기관이나 단체장의 발언 등을 통하여 43사건의 진상보고서 채택과정에 큰 역할을 담당했던 문학작품, 43 연구소, 언론, 방송 등을 하나 하나 소개하고 있다. 특히 기록필름을 많이 사용함으로써 작품의 진정성과 역사성을 높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남성 해설가의 음성은 여전히 감정적인 톤이며, 증언자의 감정적인 표정과 목소리가 두드려지게 표현되고 있다. 반면 운동을 증언하는 전문가는 침착하게 운동과정을 설명함으로써 객관성을 높이고 있다.
요약하면, 아직은 많지 않은 작품 수이지만 영상담론이 바뀌어가고 있다. 진상보고서 채택이라는 큰 사건으로 이제까지 지배적 담론이었던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유린’은 이제 더 이상 강조하지 않아도 좋은 시점에 이른 것이다. 이제 공식역사가 된 진상보고서의 관점으로 당시의 기록필름을 재해석하고, 이제까지 시도해 왔던 ‘진실 찾기’보다 어떻게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는가를 다시 보는 방향으로 담론이 바뀌고 있다.
Ⅸ. 결론
1948년 이래 제주도는 줄곧 ‘43도’였다(현길언 외, 43도 유채꽃). 그것은 자랑스런 이름이 아니라, 불온한 섬, 반역의 땅이라는 낙인의 기호로서였다. 국민국가의 법과 이데올로기의 테두리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인 이상, 제주사람들(‘제주도 출신’)에게 그러한 낙인이 가져오는 정치적심리적 효과는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운명’이니 ‘천형’이니 하는 말을 곧잘 떠올리게 되는 멍에나 족쇄에 단단히 매인 것과 같았다. 치유되지 못하는 가슴 속 상처와 드러내어 풀지 못하는 통한이 그것에 같이 결부되어 있었다. 그래서 제주도는 사철 아름다운 풍광 속에 깊은 슬픔과 숨죽인 흐느낌을 감추고 있는 설움의 땅으로도 비쳤다.
그렇다면 제주도 43사건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1948년 4월 3일 미명에 제주도 전역에서 좌익 무장대 조직이 경찰관서와 우익인사들을 습격한 사건, 혹은 결국 패퇴하고 만 무장봉기, 그것 만이었던가? 적어도 수십만 제주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제주도 43사건은 훨씬 그 이상의 것이었다. 가족친지를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의 떼죽음과 행방불명, 수난의 기억으로 떠오르는 갖은 고통과 오욕의 체험, 사건 종결 후에도 늘상 따라다니는 정치적 핍박과 소외, 그로부터 입게 된 크나큰 심리적 상처들...... 43은 흔히 그렇게 인식되며 기억되고 있었다. 봉기의 중요한 심리적 동력이 되었던바 ‘해방 공간’에서 대다수의 제주도 토착민들이 품었던 열망과 뒤이어 갖게 된 좌절감분노, 그리고 그 배경요인으로서의 정치사회 상황은 거의 잊혀졌거나 ‘혼란’‘준동’으로 간단히 매도되고 무시되었다.
국가는 제주도 43사건 봉기를 냉전적 반공이념의 잣대로 재단하여 ‘공산폭동’으로 규정짓고, 자기 또는 그 대리인들의 주민학살 행위를 합리화하며 면죄부를 주었다. 그와 반대로 제주도 주민들은 ‘빨갱이’‘폭도’였거나 그 자식이고 형제일 터이므로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듯, 촘촘한 연좌제의 그물로 계속해서 옥죄었다. 그래서 더욱 위축되어 간 제주사람들은 섬주민이어서 맛보게 되는 고립감까지 더해져, 답답하고 막막하며 억울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어디에건 호소할 길도 없었다.
43이 분명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었다면, 또한 잊고 싶으나 잊어버리지 못하는 역사적 비극이었다면, 그 진상이 제대로 규명되고 상처는 치유되어야 했다. 나아가 올바른 성격 규정도 있어야 했다. 그러나 실제는 그 반대였다. 봉기의 원인과 대량학살의 진상에 대한 학문적 접근의 통로조차도 오래도록 차단되고 있었다. 진실 탐사와 발굴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43의 진실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에 갇힌 것처럼 철저히 봉인되고 차폐된 채 거의 질식사할 지경에 놓여 있었다. 자기 보안에 급급한 반공주의 국가와 그 체제를 극력 엄호부지해 온 극우냉전세력은 43의 진상을 일방적으로 규정지어놓고 그 인과관계 해석권도 마냥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건 발발 후 40년이 경과한 시점인 1980년대 후반에 그러한 철벽봉쇄 체제는 도전받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현대사 재조명재인식의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공산폭동론에의 대항담론으로 민중항쟁론이 대두하였고, 대학살의 실상과 그 책임소재의 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민주화운동의 진전과 더불어 점점 힘을 얻었다. 그렇다고 43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쉽게 바뀐 것은 아니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격렬한 논쟁과 상호공방의 정치투쟁이 43의 재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졌고, 43의 진상을 밝혀내면서 그 역사적 성격과 의미도 새롭게 규정할 수 있게 하려는 사회운동과, 43의 진실을 찾고 알리며 그로써 43의 기억도 변환시킬 것을 꾀하는 문화운동이 활성화해 갔다. 바꿔 말하면, 43을 둘러싼 전면적 기억투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참고문헌
강창일(2001), \'제주 4·3\' 진상규명운동과 한국 민주주의,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김창후(2003), 4·3 항쟁, 그 진실과 현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권귀숙(2003), 4·3의 대항기억과 영상, 제주학회
박찬식(2010), 제주지역의 4월혁명과 지역사회의 변화, 제주학회
양정심(2006), 배제된 기억 : 제주4·3항쟁의 역사, 제주4.3연구소
현석이(2006), 도제 실시를 통해 본 \'제주 4·3\'의 정치 사회적 배경,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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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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