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건국준비위원회결성, 8 15해방(8 15광복),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신탁통치반대, 3 1시위,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반미반정운동, 2차미소공위,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4 3항쟁(4 3사건)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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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건국준비위원회결성, 8 15해방(8 15광복),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신탁통치반대, 3 1시위,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반미반정운동, 2차미소공위,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4 3항쟁(4 3사건)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개요

Ⅱ.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건국준비위원회결성

Ⅲ.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8 15해방(8 15광복)

Ⅳ.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신탁통치반대

Ⅴ.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3 1시위

Ⅵ.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반미반정운동

Ⅶ.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2차미소공위(2차 미국과 소련의 공동위원회의)

Ⅷ. 제주도 좌익세력발전과 4 3항쟁(4 3사건)

참고문헌

본문내용

명의 군중들이 함덕지서를 공격하여 경찰관 2명을 체호하여 구타하자 경찰이 발포하여 여자 1명에게 부상을 입히고 무력으로 해산시켰으며, 같은 날 조천면 북촌리를 공격하던 경찰 2명이 군중에게 체포되어 구타당하였다. 한편 좌익계는 극우파인 제주도지사 유해진의 암살을 요구하는 전단을 살포하는 선전공세도 동시에 진행해 나갔으며 그들의 이러한 선전 공세는 “미군 축출”, “경찰 공격”. 그리고 “우익 저주”를 요구하는 전단의 살포를 통하여 더욱 가열되어 갔다. 이에 대하여 미군정은 8.15를 기하여 다시 좌익계에 대한 체포를 대대적으로 개시하여 3.1절 시위사건 이래 각지에서 발생하였던 제 사건의 관련자를 예비검속하고 좌익이라 의심되는 자는 모두 검거, 투옥하는 공격을 단행하였다. 이러한 검거열풍을 피하기 위하여 수십 명의 좌익 지도자들이 한라산으로 입산할 것을 비롯하여, 점차 많은 수의 도민이 한라산으로 입산하기 시작한다.
좌·우익계의 폭력이 교차되며 난무하는 가운데 제주도의 좌익계는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하여 조직을 정비, 강화해 나갔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3.1절 시위사건 이후 제주도민 사이에 만연되고 있던 미군정 및 우익세력에 대한 반감의 열기를 조직하여 47년 가을부터 당원충원을 시작하였고, 이 결과 48년 초가되면 60,000명의 당원과 전체 도민중 80%의 도민의 지지를 확보했다고 추정되었다. 이와 함께 남로당 제주도당은 지도부의 조직개편에 착수하였는데 이 당시 조직개편은 군사적인 경험이 더 많고, 교육 수준이 더 높으며, 보다 젊고 급진적인 리더쉽을 구축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또한 남로당 제주도당은 군사부를 새로이 설치하고 1948년 2월경부터 무장투쟁조직으로서의 ‘자위대’를 편성하기 시작하여 각 구·면·리 단위까지 그 조직을 확대해 나갔다. 이에 따라 ‘자위대’는 한라산을 비롯한 여러 산악과 밀림, 고지, 암굴과 방공호 등을 근거지로 확보하고 훈련에 돌입하였다. 남로당 제주도당은 도민에 침투된 그들의 전 조직을 효과적으로 동원함으로써 자위대의 훈련 및 본격투쟁에 소요되는 식량과 무기의 조달을 최대한으로 뒷받침하였는데 여기에는 부녀자와 학생, 아동까지 가담하여 통신, 연락, 의료와 구호지원의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제주도 좌익계의 이와 같은 조직정비, 개편 등의 이유로 인하여 한때 소강상태에 빠져 있던 제주도의 정국은 1948년초 UNTCOK의 입국과 활동 시기를 전후하여 다시 가열되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48년 1월 1일 표선면 가시리와 인접 부락을 습격하여 좌익계 주민들을 체포, 투옥한 것을 시발로 하여 동 3일과 4일에 걸쳐서는 중문면, 대정면, 제주시 일대 지역의 좌익계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였다.
1월 22일 경찰은 조천에서 개최되고 있던 남로당 제주도당의 회합을 습격하여 습격 당일에 106명을 포함하여 동 26일까지 총 221명을 체포하였고, 동시에 등사기 및 다수의 문서를 압수하였다. 그런데 이 당시 압수된 문서에서 좌익계에 의해 계획되고 있던 2월 중순과 3월 5일 사이에 폭동의 음모가 발견되자 경찰은 1월 23일부터 조천면 신촌리 및 그 인접 부락민들을 체포하였고, 동시에 전도에 걸쳐서 좌익계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를 재개하는 한편 도민이 은닉하고 있던 일제시대의 무기류의 자진반납을 종용하였다.
이렇게 경찰이 공격을 재개하고 또한 전국에서 ‘2.7구국투쟁’이 폭발함에 따라 제주도의 좌익계는 즉각적인 반격에 돌입하였다. 2월 5일 서귀포에서 경찰과 충돌한 좌익계는, 동일 한경면 고산지서를 습격하고 피검자의 석방을 요구하는 강력한 시위를 단행하였으며, 구좌면 일대에서도 세화, 김녕지서까지 시위를 단행하였다. 2월 7일 좌익계는 안덕면 서광리의 동향을 감시하던 경찰관 1명을 생포하여 생매장하였고, 이에 경찰은 동지역 주민 1명을 체포하여 고문 치사케 함으로써 즉각적으로 보복하였다. 좌익계의 공격은 2월 9일부터 11일 사이에 특히 치열하였다. 이 기간동안 제주도에서는 야음을 틈탄 17차례의 폭동과 시위가 발생하였는데, 칼과 곤봉으로 무장하고 소련 국가를 부르는 군중들에 의한 경찰서 습격, 전단 살포 및 시위 등의 과정을 통하여 2명의 경찰관이 심하게 구타당하였고, 약 290명의 군중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한편 ‘자위대’를 통하여 무장을 강화해나가고 있던 좌익계는 2월 13일 한경면 저지지서 소속의 경찰관 수십 명이 한림읍 금악리를 습격하자 일제의 38식 보병총, 수류탄, 일본도 등을 사용하여 경찰과 교전하여 격퇴하였고, 동 중순경 안덕지서 소속의 경찰관 및 우익청년단이 안덕면 사계리를 습격하자 자갈, 곤봉 등으로 반격하여 지서장을 생포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48년 초에 제주도 좌익계에 대한 경찰의 공격으로 재개된 이러한 격렬한 공방은 3월에 접어 들면서 다시 완화되었다. 즉 이 시기에는 3월 초순에 발생한 도민에 의한 함덕지서 습격사건과 경찰 및 우익청년단에 의한 한림, 애월 지구의 ‘자위대’모임 기습사건을 끝으로 별다른 충돌이 발생하지 않고 잠시 동안의 냉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제주도의 좌익계가 4.3폭동을 감행하기 위하여 그동안 발생하였던 쌍방간의 공방을 분석하고 자체의 역량을 재충전하기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하였음에 기인한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이 짧은 기간 동안의 냉전도 결국 3월말경 개최된 김달삼, 조몽구 및 국방경비대 제 9연대 문상길 등의 회합에서 무장폭동이 결정됨으로써 종결되고, 마침내 1948년 4월 3일 오전 2시 한라산을 비롯한 각지의 산악 위에서 무장투쟁을 알리는 봉화가 불타오름으로써 승자도 패자도 없고 오직 피해자만 남은 기나긴 싸움의 서곡이 시작되었다.
참고문헌
김창후(2003), 4·3 항쟁, 그 진실과 현실,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신복룡(1994), 한국 신탁통치의 연구, 한국정치학회
윤덕영(2010), 8·15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적 한계와 좌·우 분립의 배경, 한국사학회
우경화(2008), 신탁통치문제와 미소공동위원회, 한양대학교
츠카사키 마사유키(2007), 해방 직후 제주도의 정치 정세, 한국민족운동사학회
홍석표(1993), 1947년 제주도 3·1절기념시위사건 연구, 제주산업정보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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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25
  • 저작시기2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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