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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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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담양의 문화재

Ⅱ. 담양의 식생
1. 신갈나무군락군
1) 신갈나무군락
2) 신갈나무-굴참나무군락
3) 신갈나무-소나무군락
2. 굴참나무군락군
1) 굴참나무군락
2) 굴참나무-상수리나무군락
3) 굴참나무-소나무군락
3. 소나무군락군
1) 소나무군락
2) 소나무-신갈나무군락
3) 소나무-상수리나무군락
4) 소나무-굴참나무군락
4. 느티나무군락

Ⅲ. 담양의 석기문화
1. 유적현황
2. 출토유물

Ⅳ. 담양의 가사문화권
1. 식영정
2. 소쇄원
3. 송강정
4. 면앙정
5. 명옥헌원림
6. 독수정원림
7. 환벽당․조대

참고문헌

본문내용

에 급제한 면앙정 송순(宋純)(1493-1583, 자(字)는 수초(守初), 호(號)는 기촌(企村), 면앙정 성종 24년(1493) 담양군 봉산에서 출생)은 이후 명종2년(1547) 봉문사(奉聞使)로 북경 에 다녀왔으며 이후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거쳐 1550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제수 되었다. 1569년(선조2) 대사헌(大司憲),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으며, 의정부 우참찬(議政府 右參贊) 겸 춘추관사(春秋館使)를 지내다 사임하였다(77세).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 향리에 내려와 면앙정을 짓고 퇴계 이황(退溪 李滉)을 비롯하여 강호제현(江湖諸賢)과 학문을 논하며 후학을 양성하여 문인들이 신평선생(新平先生)이라 불렀다.
면앙정 송순은 후에 명유(名儒)가 된 제봉 고경명(齊峰 高敬命), 고봉 기대승(高峰 奇大升), 백호 임제(白 湖 林悌) 등이 그의 문하에 있었으며 특히 송강 정철(松江 鄭澈) 또한 그에게서 사사했다. 그의 문학작품을 보면 가사(歌辭)인 『면앙정가』를 비롯하여 『자상특사 황국옥당가(自上 特賜黃菊玉堂歌』 1편, 잡가(雜歌) 2편, 『면앙정단가』 등 과 『오륜가(五倫歌)』 5편 등이 그의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5. 명옥헌원림
정면 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정자로 실의 구성은 외부로 퇴간을 돌리고 그 중앙에 실을 둔 중앙실형(中央室形)이다. 방에는 구들을 두었고 평천장을 하였다. 마루의 외곽에는 평난간을 둔 명옥헌원림은 오희도(吳希道, 1584-1624)의 4자(四子) 오이정(吳以井, 1619-1655)이 자연경관이 좋은 도장곡(道 藏谷)에 헌(軒)을 짓고 이를 명옥헌(鳴玉軒)이라 이름지었다. 오이정은 스스로 호(號를) 장계(藏溪)라 한 바 장계정(藏溪 亭)이란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 후 100여년이 지나 정자가 퇴락 함에 따라 후손 오대경(吳大經)이 다시 중수하였다.
명옥헌(鳴玉軒)은 정자 앞에 연못이 파져있고 둘레에 적송(赤松) 및 자미나무 등이 심어져 뛰어난 조경으로 알려졌으며, 장계정(藏溪亭)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또는 뒤편 에 도장사(道藏祠)라는 사당에 있으므로, 도장정(道藏亭)이라고도 부른다. 명옥헌원림은 주변의 자연경관을 차경(借景)으로 도입한 정사(亭舍)중심의 자연 순응적인 전통정원양식 이지만 전(前)과 후(後)의 조선시대 전통적인 \'방지중도형(方池中島形)\'의 지당부(池塘部)를 도입하였다 전(前)의 지당부는 명옥헌의 북쪽에 위치하며 그 고저차는 약 6.3m이다. 동서너비 약 20m, 남북길이 약 40m 크기를 갖는 방지의 중심부는 원형의 섬이 있으며 주위에 약20주의 자미나무가 심어져있는데 수령 은 100여년 정 도이다. 명옥헌의 동쪽에 자리잡은 지당(池塘)은 동서 16m, 남북 11m 크기이다. 이 지당은 1979년 여름에 조사 발굴된 것으로 남에서 북으로 흐르고 있는 계류의 물을 끌어 채운 것으로 북과 서 쪽에는 자미나무가 심어져 있다.
6. 독수정원림
현재의 독수정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정면 1칸과 후퇴(後退)를 온돌방으로 꾸몄다. 창호는 띠살 창인데 측면은 2분합, 정면은 4분합 들어 열 개로 하여 걸쇠에 걸게 하였다. 독수정(獨守亭)을 창건한 서은 전신민(瑞隱 全新民)은 고려말의 공민왕대에 북도안무사(北道按撫使) 겸 병마원수(兵馬元帥)를 거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역임하였고, 고려 가 멸망하자 두문동 72현(杜門洞 72 賢)과 함께 두 나라를 섬기지 않을 것을 다짐하며 이 곳에 은거하면서 정자를 지었다고 전한다.
독수정은 고종28년(1891)에 후손에 의해 재건된 것이며, 1915년에는 떼지붕을 기와지붕으로 바꾸고 1972년 중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으며 지방기념물은 정자건물이 아니고 정자주변의 원림이 지정되어 있다. 전신민(全新民)은 계류(溪流)가 흐르는 남쪽 언덕 위에 정자를 짓고 후원(後園)에는 소나무를 심고 전계(前階)에는 대나무를 심어 수절을 다짐했다. 또한 독수정의 방향은 북향(北向)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아침마다 송도(松都)가 있는 북쪽을 향하여 곡배(哭拜)하기 위함이다. 독수정(獨守亭)이란 명칭은 이백(李白)의 시에 나오는 \'夷齊是何人 獨守西山餓\'에서 따온 것으로 은사(隱士)의 고절(高節)을 나타낸 것이다.
독수정역(獨守亭域)은 진입로에 중국원산종인 회화나무, 자미나무 등의 노거수가 심어져 있고, 정(亭)의 앞에는 자미나무, 매화나무 등 중국원산종의 수목이 심어져 있는데 그 크기로 보아 1890년대 중건 당시에 심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경적인 측면에서 볼 때 고려시대에 성행했던 산수 원림으로서의 기법을 이 지방에 도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7. 환벽당조대
환벽당은 홍문관 교리, 나주 목사 등 13개 고을의 성주를 역임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 사촌 김윤제(1501~1572)가 창건하고 육영에 힘쓰던 곳인데 송강 정철, 사하당 김성원 등이 대표적인 제자다. 담양가사문화권역에 있는 환벽당(環碧堂)은 광주호 상류 충효 동쪽 높다란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다.
부근에 위치한 용소는 환벽당 및 창계천의 깊은 물웅덩이를 말하며 이곳은 송강 정철에 대 한 전설이 얽힌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환벽당에서 사촌이 낮잠을 자는 데 꿈에 환벽당 앞 용소 에서 청룡이 하늘로 승천하는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나 이를 이상이 여겨 하인을 시켜 살펴 보라 하였는데 어린 동자가 목욕을 하고 있었다. 이 동자가 바로 집안이 역적으로 몰려 피신하는 길에 잠시 쉬고 있던 송강 정철이다. 사촌이 송강을 불러 문답하는 중에 그 영특함에 놀라 자기 슬하에 두고 학문을 닦게 하 여 송강 나이 17세에 그를 외손녀 사위로 삼고 정철의 뒷바라지를 했다. 용소 옆에는 송강이 이곳에서 낚시대를 드리우고 고기를 잡았다는 조대가 있다.
참고문헌
권수용(2008) - 담양지역 학구당의 역사와 그 의미, 전남대학교
대한전기협회(2005) - 대나무와 정자의 고장, 담양
안종헌(2003) - 담양 중심부 입지분석에 관한 연구, 전남도립대학
오강호(2012) - 담양·장성의 지형과 지질 탐구, 전남대학교출판부
한일편집부(2005) - 장성, 담양, 한일지도
한국지방재정공제회(2012) - 명품 숲길의 고장 담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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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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