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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전래][천주교 전래][성결교회 전래][장로교 전래][유교 전래][불교 전래][불상 전래][서양과학]천주교의 전래, 성결교회의 전래, 장로교의 전래, 유교의 전래, 불교의 전래, 불상의 전래, 서양과학의 전래 분석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천주교의 전래
1. 종교철학
1) 신의 명칭과 개념
2) 창조주로서의 신
3) 인격신으로서의 신
2. 심리철학

Ⅱ. 성결교회의 전래
1. 직접전도에 의한 선교
2. 초교파적(Ecumenical) 선교
3. 부흥회식 선교
4. 성서학원 우선적 선교

Ⅲ. 장로교의 전래

Ⅳ. 유교의 전래

Ⅴ. 불교의 전래
1. 서언
2. 불교 수용의 배경과 조건

Ⅵ. 불상의 전래
1. 고려시대
2. 조선시대

Ⅶ. 서양과학의 전래

참고문헌

본문내용

사원과 거대한 탑, 불상이 조성 되었다.불상의 중심지도 경주를 벗어나 지방 여러 곳에서 선종사찰이 세워짐과 동시에 지방호족들의 후원으로 불교미술도 지역적으로 발달하였다. 즉, 강릉 지역을 중심으로 통일신라 양식을 계승한 불상형식이 나타나며 연산 개태사 삼존불상이나 논산 관촉사 보살입상, 부여 대조사 보살입상 등 충청도 지역에서도 개성적이고 규모가 큰 대형불상들이 유행하였다. 고려 초기에도 역시 중국 오대(五代), 요(遼), 송대의 불상에 영향을 받았지만 고려 나름대로의 지역성과 토착적인 조형미를 살려서 인간적인 부처의 모습으로 발전해 나갔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충청도 문수사, 장곡사의 금동불좌상과 같이 온화하고 정돈된 조형감을 보여주는 불상이 만들어지는 한편, 원나라 왕실과의 교류로 인하여 라마불상의 영향을 받은 장식적이고 새로운 불상형식이 일시적으로 유행하여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었다. 불상의 양식은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였으나 표현이 둔화되고 위축되었으며 신비성이 사라졌다.
<참고> 불상의 의미와 규모의 관계 불상은 두 가지의 의미를 지닌다.
① 예배의 대상으로서의 불상이다. 즉 인간은 불상이 표현하는 불력에 의해 구제를 받는다. 절대귀의 감정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 경우는 대작이 만들어진다.
② 자력적인 상이다. 불상을 보는 자는 불상이 지닌 불심을 자기 마음으로 한다는 의미를 지니므로 불상을 믿고 있으면 자신이 불심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이 경우 불상은 되도록 작게 만든다.
이렇게 고려시대의 불상조성 기법이 퇴화된 원인은 우선 선종의 영향으로 보인다. 선종은 불상에 대한 예배보다는 조사의 언행을 따르고 선을 통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중시되었으므로 불상에 대한 의욕이 쇠퇴된 것이다. 이 시기 불상의 특징은 눈꼬리가 길게 옆으로 돌아가고 입은 괴상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상의 미학적 측면에서 보면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하는 퇴화현상이지만 선종의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시도로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고려 불교의 대중성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고려의 불교는 일부 출가자에 의한 선종이 유행하긴 했으나 전체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불교신앙의례가 성행하였다. 즉 수행의 의미보다는 절대귀의 감정의 대상으로서 또는 예배의 대상으로서 불상을 숭배하므로 대작을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후기에는 라마교가 들어오면서 새로운 양식이 시도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고려시대의 불상>
고려시대
불 상 이 름
① 관촉사 석조 보살입상
② 파주 용미리 석불입상
③ 거창 상동 석조 관음보살 입상
④ 월정사 석조 보살좌상
⑤ 영탑사 금동 3존불
⑥ 장곡사 금동 약사여래좌상
⑦ 선운사 금동 지장보살좌상
⑧ 부석사 소조 여래좌상
2.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불교를 탄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이른바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정책과 함께 국가적인 후원이 줄어들어 불상은 전반적으로 쇠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초기에는 고려 불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나 차츰 민간신앙과 결합하여 토착적인 성격이 강해지면서 주로 개인의 행복이나 내세를 위해 소규모의 불상 제작과 개인용의 불감(佛龕), 목각탱 등이 만들어졌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불교가 위축되었으나 자취를 감춘 것은 아니었다. 즉 사회적으로 공인이 되지 않았을 뿐 개인적으로는 왕실에서 서민까지 신앙행위를 해 왔다. 대신 공인이 되지 않은 탓에 사회사상과는 직결되지 못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불상은 형식적으로 아름답지 못하였고 깊이도 없었다. 예배의 대상도 존귀한 대상도 아니고 단지 예의와 형식으로서 갖추어지는 조형물이었다.
조선시대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인체의 파악이 부족
② 측면관에서 등이 앞으로 굽고 턱을 내밀고 있다.
③ 개성적이지 못한 얼굴
④ 법의는 두텁고 인체의 표현이 없다.
⑤ 의문은 사실적이지 못한고 형식적
⑥ 세속화 된 경향이 농후
이것은 정신과 기법이 동시에 퇴화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퇴화와는 성격이 다르다. 고려시대에는 그나마 개성이 남아있었다.
<조선시대의 불상>
조선시대
불상이름
기림사 건칠 보살좌상
수종사 석탑발견 금동 보살반가상
선운사 금동 보살좌상
대승사 목각탱
상원사 목조 문수동자좌상
지정 번호
국보 779호
보물 575호
Ⅶ. 서양과학의 전래
1601년에 마테오리치가 북경에 자리 잡은 이래 서양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과학이 전래되어 오기 시작했다. 그 후 서양 선교사를 왕자 장례식 택일과 관련하여 몰아내는 등 중국의 보수 세력의 공격이 있었음에도 행성운동의 계산 등에서 서양식 방법이 우수하다는 사실은 점점 명확해졌다. 그 후에도 계속 밀려들어 오는 서양 과학을 공부하던 중국인들은 중국 천문학 전통을 자랑하는 등 훌륭한 과학 사상은 중국에서 먼저 일어났음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이른 바 ‘서양과학 중국원류설’인데 그 예로 증자의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 천원술등 방정식의 풀이법, 장형의 ‘지동의’를 들 수 있겠다. 그 뒤 결국 중화사상을 토대로 한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흡수를 해 오던 중국은 아편전쟁(1839년)이후 ‘중체서용’을 통한 부국강병을 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다지 성공적이라 할 수는 없고 1895년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는 중화사상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그들을 일깨워주었다. 제도의 개혁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 지식층은 변법개제운동을 시작하였으나 뿌리 깊은 보수세력 앞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진화론 등 과학적 지식은 사회현상도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되게 되었으며, 과학주의가 모든 사회전반을 휩쓸게 된다. 이러한 분위기의 종착역은 결국‘과학적’사회주의국가의 수립이었고, 막상 과학 그 자체의 발전은 이루지 못했다 하겠다.
참고문헌
강중기, 현대 중국의 유교 논쟁, 한국동양철학회, 2011
권용국, 한국성결교회의 구원의 서정, 성결대학교, 2012
권일찬, 동양학과 서양과학의 비교고찰, 충북대학교사회과학연구소, 2010
김형철, 개화기의 천주교, 개신교 관련 자료, 국어사학회, 2011
김금용, 장로교 설교에 대한 한 연구, 호남신학대학교, 2010
한상길, 한국 근대불교의 불교문화재 인식, 불일출판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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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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