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요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정,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기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국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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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요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정,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기활동,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국설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중요성

Ⅲ.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정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기활동

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구

Ⅵ.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군

Ⅶ.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의정원

Ⅷ.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교통국설치

Ⅸ.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착수하여, 1919년 8월 20일臨時地方交通事務局章程’을 반포하여 지방 교통국의 설치와 조직을 확정하였다. 이 장정의 제1조는 “교통부 郵傳事務를 위하야 重要地點에 임시교통사무국을 置함. 局의 위치는 交通總長이 此를 定하되 그 관할지역은 현행 聯通制를 準據함. 임시지방 교통사무국은 아즉 來往 人員 接際의 事務를 兼掌함”이라 하여 교통국의 설치를 명시하였다. 그리하여 이후 본격적으로 아래와 같이 국내와 만주지역에 교통국의 설치를 추진해 갔다.
①교통부 안동지부 사무국(임시안동교통사무국)
- 통신원 배치지역 : 安東定州北河泊安州新義州平壤龍川黃海道
鐵山京城
龜城郡 교통지국
②義州郡 교통국
北區 교통국(舊義州城內)
-交通所 설치지역
-舊義州市 교통소(義州邑內)
-水鎭 교통소(水鎭松長)
-古城 교통소(古城多智島)
-新義州 교통소(新義州光城)
-威北 교통소
-光成 교통소
南區 교통국(古館面 土矯)
-교통소 설치 지역
-古館 교통소
-古津 교통소(古津咸遠)
-枇峴 교통소(枇峴月華)
-古寧朔 교통소
-玉尙 교통소
③江邊8郡 임시지방교통국
-삭주창성벽동초산위원강계자성후창
④임시함경남도교통사무국
三水 支局豊山 지국
8道溝(長白縣-필자주) 지국
咸興 지국
洪厚 지국
寺洞지국 사무국
寺洞 지국
接厚里 지국
甲山 지국
北靑 지국
端川 지국
利川(原) 지국
洪原 지국
⑤寬甸 통신국
⑥京城 교통국
이상에서 보듯 임정의 교통국은 국내에는 평안남북도함경남도황해도서울 등지에 설치되었고, 만주에는 寬甸縣과 長白縣에 설치되었다. 지리상으로 이들 지역 모두가 안동과 쉽게 통할 수 있는 지역이었다. 강변 8군에 설치된 교통국의 경우는 압록강변의 지역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서북간도 독립군단들과의 연락사항이 용이하도록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국내 통신원 설치의 지점을 보면 안동에서 서울까지 이르는 통로의 요충지에 배치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서울의 정보가 가장 신속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통신원의 설치가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또 장백현의 8도구에서 시작되는 함남교통사무국에서 배치한 각 支局들은 압록강변에서 동해안까지 이어지는 교통로에 세워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통로의 남쪽 끝 지점인 함흥은 교통의 요지로, 육로와 해로가 발달하여 한반도의 어디든지 연결될 수 있는 곳이었다.
관전현 또한 안동과 접해 있는 지역이었다. 관전현은 독립군의 근거지로서 일찍부터 독립운동의 세력이 활동하던 곳이었다. 때문에 31 운동 후 대한독립청년단이 결성되었으며, 이무렵에는 대한독립청년단을 발전적으로 개편한 대한청년단연합회의 본부가 있던 곳이다. 관전현의 교통국 설치는 이 같은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조직을 기반으로 생겨난 것이었다. 따라서 관전교통국의 업무는 청년단연합회 통신부장 吳學洙, 교제부장 金斗萬 등이 겸임하고 있었다.
Ⅸ. 결론
31운동 직후 출현했던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상해로 통합되어 일원화된 조직으로 나아가게 되자, 일제는 임시정부의 움직임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제는 표면적으로는 토지와 인민을 갖지 못한 정부라는 것은 웃음거리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임시정부를 독립운동 단체 가운데 하나로 치부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 자금이 답지하고 연통제와 교통국의 조직 등을 통해 한국 내에 영향력을 확대해 가면서 한국인들이 임시정부에 대해 커다란 기대를 보이게 되자 내심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였고 구체적인 대응책 마련에 부심하였다.
일제는 특히 임시정부를 구성하고 있었던 다양한 성향의 인물들이 보이고 있었던 갈등 양상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이를 이용하면 임시정부의 기초를 붕괴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이들의 회유 이간 책동을 강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시정활동 가운데 핵심을 이루고 있었던 내정의 통일집중대적교통 부분, 외교의 세계에 대한 선전 부문에 대한 대책이 임시정부에 대한 정책의 주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임시정부가 상해의 프랑스 조계지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임시정부에 대한 단속은 일본 외무성과 상해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주도하고 있었고 프랑스와의 관계도 매우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였다. 특히 프랑스 측이 임시정부 요인들을 정치범으로 간주하고자 하는 입장 보이면서 아울러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던 안남 출신 독립운동자들의 처리 문제를 구실로 일제에게 상호주의 원칙을 요구하자 일제는 프랑스의 태도에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일제의 궁극적인 대책이라는 것은 조직을 해산시켜 근원적으로 파괴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강압책으로만 일관할 경우의 부작용을 우려하여 회유 이간을 통한 붕괴 공작도 함께 병행하고 있었다. 우선 강압책으로는 국내와의 연락기구였던 교통국과 지방행정기구였던 연통제에 대한 파괴 작업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임시정부와《독립신문》에 대한 직접적인 폐쇄를 통해 임시정부를 무력화시키고 한국인들의 민심 동요를 유도하였다. 특히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에 취해진 폐쇄 조치는 임시정부가 상해로부터 근거지를 옮겨 이동기로 들어가게 하는 결정적인 타격이 되었다.
임시정부에 대한 이간 회유 책동은 거의 모든 임시정부 요인들을 대상으로 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본의 실정을 이해시킨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회유 공작은 결국 이들을 ‘귀환’시킴으로써 한국인들의 여론을 호도하고 민심을 교란시키는 민족분열 책동의 하나였고, 임시정부를 붕괴시키는 작업이었다. 이 밖에도 친일신문의 발간 유도, 독립운동 자금의 차단, 밀정의 운용 등을 통해 임시정부 요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일제의 정보망 속에서 파악하고 이를 교란하는 책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참고문헌
김지암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제적 요소의 영향,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2010
김희곤 -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대로 알기, 본질과현상사, 2009
유준기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적 정통성과 그 의의,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정용욱 -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환국과백범, 백범학술원, 2009
조기화 -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와 대한민국수립(大韓民國樹立),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2010
현대한국학연구소 외 1명 - 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연세대학교 현대한국학연구소,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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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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