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파와 척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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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개화파와 척사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개화파와 척사파의 대립

Ⅲ. 결 어

본문내용

전쟁과 연합하지 못함
Ⅲ. 결 어
19세기 중엽부터 시작 된 서양세력의 침입은 국내의 정세와는 상관없이 진행 된 세계사적 움직임이었다. 유럽이 신대륙 미국을 발견했을 때와 같이 그들의 눈에는 중국과 조선, 일본은 기회의 땅, 오랜 세월 동안 부를 축적해 온 약소국들로 보였을 것이다. 어찌되었든 강대국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중국이 서양문물을 받아들였다. 일본도 서양의 통상요구 거절하긴 했지만 결국 강압적인 위협에 굴복하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이제 조선만이 동북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고 오히려 격렬하게 외세에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과연 무엇이 최선의 대안이었을까?
우리의 조상들은 이에 두 가지 극적인 반응을 보이게 된다. 개화사상과 위정척사사상이 그것이다. 조선의 내적 모순과 서구 열강의 침탈이 눈앞에 와 있다는 것을 실감한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개화파는 적극적으로 서양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주변국가에게 뒤지지 않는 자주적인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자주적이지 못하고 외세 의존적 성격의 개혁을 반복함으로써 국내에 외세의 간섭을 끌어들였고 국토를 그들의 각축장으로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국권을 상실하게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반면에 봉건 왕조 체제를 유지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근대화를 지연시키고 국가발전을 저하시킨 시대 역행적 사상으로 비판받고 있는 위정척사사상은 또한 이질문화의 도전으로부터 전통문화를 보존하고 민족의 주체자주의식에 바탕을 둔 저항적 민족주의 운동을 전개했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개화사상은 시대적 흐름을 잘 파악하고 그 시대에 필요한 주장들을 잘 펼쳤지만 주체의식과 자주적 발전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우리의 것을 지키고 보전하려한 위정척사사상은 전통적인 체제와 질서를 그대로 유지시키려는 소극적이면서도 수동적인 성격이 짙었다고 할 수 있겠다.
한국 행정의 근대화의 계기가 되기도 했던 이 시기에(군제개혁, 일본에 시찰단-청에 영선사 파견, 통리기무아문 재편, 근대문명의 수입, 각종 문물 수용 등) 국내 상황의 필요에 의한 발전은 있었지만 강대국들을 너무 의존 한 나머지 온 국민이 고통과 아픔을 경험해야만 했다. 일제시대를 거치고 미국 행정학이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도입되었을 당시에도 역시 비슷한 모습을 보게 된다. 이론적으로는 그리고 미국문화에서는 가장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이론들과 제도들이었지만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적용하려한 우리 나라에서는 얼마나 많은 부작용과 역기능들을 내었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좋은 길은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좋은 길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다. 옳은 길은 자기자신에게 알맞은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될 것이다. 극단으로 치우치긴 했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려 노력한 개화파와 척사파의 사상과 활동을 돌아봄으로써 우리는 이들의 사상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또 다른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것을 먼저 알고 지켜나감과 동시에 세계화의 흐름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길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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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08.20
  • 저작시기2013.8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740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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