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민주적 사상가 - 함석헌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주체적, 민주적 사상가 - 함석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함석헌 (실존인물)
생애

업적

1945년 12월에 열린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와 1948년 4월3일날 발생한 제주도 4.3 사건에 대한 생각과 느낌

해방 직후의 느낌

나라에 바란 점




기회주의적인 공무원 (가상인물)
생애
해방 직후의 느낌
나라에 바란 점


나의 생각(느낀 점)

본문내용

의 고위직 공무원이 된 사람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김 아무개는 이 사람의 추천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공무원이 되었다. 여기서도 김 아무개는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하여 상관들에게 잘 보이려 노력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을 하면서 전쟁이 발발했다. 김 아무개는 전쟁 통 속에서 자기 가족의 안위 만을 생각하여 일단 아는 고위직 공무원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왜냐하면, 괜히 북한에 잘못 걸려서 자신이 친일을 했다는 전적이 들어나게 되면 그 날로 목숨이 끝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나고 1953년 10월, 김 아무개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에 있는 동안 그는 영어 공부에 충실하였다. 이것 또한 자신의 직업을 보장하기 위한 하나의 대응책 이었다. 전쟁이 끝날 경우, 우리나라가 미국의 지배 아래 놓일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기 때문이다. 돌아와서 그는 ‘자신은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전쟁 전에는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면서 자신이 미국과 통하고 동시에 우리나라를 잘 이끌어 나갈 인재’라고 하면서 국회의원에 도전하였다. 마침내 국회의원에 당선된 김 아무개는 호의호식을 하다가 1960년 4·19혁명이 발발한 이후 자신의 일제시대 때의 행적이 들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김 아무개는 감옥에 수용되었다가 1961년 아는 사람의 힘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그 뒤, 김 아무개는 지방으로 가서 자신의 지금까지의 행적에 대한 양심이 가책을 느끼면서 요양을 하던 중에 친일을 했던 사람들을 증오하는 무리들에 의해 1965년, 51세의 나이에 사살되었다.
해방 직후의 느낌
김 아무개는 해방이 되었을 때, 참으로 난감했을 것이다. 물론, 해방이 되어서 일본의 지배아래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기쁜 일이나, 자신의 앞길을 생각하면 막막했을 것이다. 친일을 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국에서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즉, 해방 자체는 즐겁지만 한 번 더 생각할 때는 별로 달갑지 만은 않았을 것이다.
나라에 바란 점
김 아무개가 그 당시 나라에 바란 점은, 나라가, 친일을 했던 자신을 버리지 말고 그 때의 능력을 봐서라도 다시 공무원으로 등용해줬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나의 생각(느낀 점)과 그 당시 상황에서의 나의 모습
이번의 해방과 관련된 주제에 관해서는 고등학교 때도 배운바가 있다. 근현대사 과목에서 해방 전의 일제시대 때의 여러 가지 사건과 우리 민족의 고통, 핍박들과 해방의 기쁨, 그리고 암울한 이후의 우리 역사의 흐름 등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이번에 그 시대에 살았던 주요 인물들에 관해 조사하면서 그 시대의 사람들의 생각과 고뇌를 더 많이 알 수 있었다.
함석헌 선생의 경우, 해방 후 민족자주와 민주화 운동의 중심에 섰고, 외세와 독재와 외래문화에 맞서 주체적인 정신과 삶을 추구한 사상가이자 교육자이다. 함석헌 선생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통합과 자주정신을 고무시켰고 민주화를 이룩해나가는데 큰 역할을 한 장본인이다. 이러한 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나라가 존재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내가 가상 인물로 정한 ‘기회주의적인 공무원’은 함석헌 선생과는 달리 기회주의적이고 이해타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자신의 처우를 생각하는 인물이다. 이렇게 해방의 시기에도 나라를 걱정하는 사람과 자기 자신 만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번 조별 토론의 과정에서도 그랬듯이 이 시기의 주요 인물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다. 먼저 공통점은, 해방 후 각자의 사회적 지위 여하에 불문하고 자신의 앞날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해방으로 인해 혼란스러웠고, 변화의 과도기적 상황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사상과 좀 더 가까운 국가관을 원하고 또 거기에 맞춰 자신만의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점인 것이다.그 다음 차이점은, 경제적 지위에 따라 국가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국가에 바라는 체제가 달랐던 것이다. 경제적 지위가 낮으면 국가위주의 경제성장을 원하는 즉 사회주의 체제를 원했고 어느 정도의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능력이 발휘되고 자유가 보장된 자유경제질서를 원한 것도 차이점으로 들 수 있었다.
그리고 비록 지금의 나는 이미 지난 해방 시기의 여러 가지 일들과 그 결과들을 알고 있으나, 그 당시의 상황으로 되돌아간다면 어떻게 했을까? 그 당시 나의 나이를 지금과 비슷하게 하고 고등학교에 다녔다고 가정하고 생각해보겠다. 먼저, 해방 전의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반, 일본 군주의 우리나라에 대한 억압과 통치가 최고조에 다다랐을 때, 나는 일제의 강제 징용과 징병에 대해 아주 분을 삭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에 저항 하려고 해도 일단 힘이 턱없이 부족하고 나 또한 징집의 대상자이고 동시에, 집에서도 내가 위험해 지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섣불리 나서지 못 했을 것이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이 된 날, 나는 아주 기뻐했다. 거리로 나가서 사람들과 함께 ‘대한 독립 만세~만세~’를 외치고 태극기를 급조하여 들고 뛰어다녔다. 그리고 일제의 잔재들 예를 들어, 현재의 파출소와 같은 곳으로 가서 물건들을 집어 던지고 일본인들을 쫓음으로써 해방이 되기 전까지 참아왔던 울분과 화를 풀어내었을 것이다. 이것이 비록 감정적이고 소시민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이렇게 밖에 할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주 후회를 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1946년이 되던 해, 나는 나라를 위해서 무언가 하기위해서는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대학에 가기 위한 공부를 하였다. 그 결과 지금의 서울대학교인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고 나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당시에 이루어진 여러 이슈들 예들 들어, 좌익이니 우익이니 사회주의 체제니 자본주의 체제니 또, 주변 강대국들의 우리나라에 대한 신탁통치 찬성이니 반대니 하는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참여하였을 것이다. 즉, 현재의 나의 꿈이 공무원이 되는 것이니 만큼 그 당시에도 나라를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했을 것이기 때문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였을 것이다.
  • 가격1,4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13.10.01
  • 저작시기2013.9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83912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