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 - 한자 초기 북유럽의 상인 네트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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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학 - 한자 초기 북유럽의 상인 네트워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도입

2. 한자 성립 이전 상인들과 네트워크의 흔적
1) 안스카리우스의 여정
2) 프리슬란트인과 초기 원거리교역의 중계지 비크
3) 네트워크의 확대 - 스칸디나비아인의 활약과 발트해

3. 뤼벡의 건설 시기 - 네트워크의 안정적 발전
1) 정기시의 역할
2) 안정적 네트워크의 토대: 뤼벡의 건설과 정치적․군사적 후원
3) 고트란트 대상(隊商)

4. 결론

본문내용

집단을 중재하여 서약에 의한 평화를 확립한 사건에서 찾았다. Dollinger, Die Hanse, pp. 41-42.
그들의 교역 네트워크는 뤼벡-고트란트-리가와 고트란트-네바(Neva)-노브고로드를 넘어서까지 이어졌고, 서유럽의 런던, 브뤼헤와 더불어 한자 동서교역체제의 핵심축으로 발전하였다. A. von Brandt & U. Arnold, "Die Hanse," in Handbuch der europaischen Geschichte, vol. 2, 1987, p. 492.
교역방식, 선박, 조직의 효율성으로 인해 한자는 곧 유럽의 북동과 북서 지역 사이의 상품교역시장을 지배하였다. Ellmers, Die Entstehung der Hanse, p. 5.
한자가 견지하였던 기본정책은 상인들의 자율성 보장, 제후들에 대한 공동방어, 시장 및 통상로 확보 및 유지에 공동대처, 관세경감 및 상업 독점 같은 상업상의 특권 획득, 상관의 설치 등이었다. 초기부터 일관된 목표를 관철하였던 고트란트 대상조합은 한자 자치조직의 기본모델이 되었다. 이는 필립의 평가이다. Gutram Philipp, "Leittexte," in Hanse in Europa. Brucke zwischen den Markten 12. bis 17. Jahrhundert, Koln, 1973, p. 345.
뤼벡시가 차츰 경쟁적인 지위로 성장해 왔지만, 고트란트 대상조합은 13세기 중엽까지 교역체제에서 주도적인 지위를 상실하지 않았다. 13세기 중엽 이래 한자의 선박 코게(Kogge)는 기술혁신을 통해 항해에 적합한 능력을 획득하였으며, 그로 인해 고트란트는 해안을 따라 항해하던 시기에 누리던 거점으로서의 중요성을 상실하였다.
이 조합과 발트해 교역 및 뤼벡, 리가, 비스비 사이에는 긴밀한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반면 플랑드르와의 교역관계는 뤼벡시가 함부르크시와 더불어 주도하였기 때문에 고트란트 대상조합은 플랑드르와의 교역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잉글랜드와의 교역도 뤼벡과 함부르크가 주도하였다. Kattinger, Die Universitas der Gotlandfahrer, pp. 61-62.
13세기 초 이래로 발트해 지역의 상인들이 상품을 직접 잉글랜드와 플랑드르에 공급함으로써 한자의 교역체제는 더욱 진전되었다. 라인강 하류와 엘베강 하류 지역의 상인들은 서쪽으로는 잉글랜드로 여행하였고, 동쪽으로는 비스비와 노브고로드, 스몰렌스크(Smolensk)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목적지에서 얻은 상품을 고향이나 정기시에서 판매하였다. 13세기를 경과하며 이 교역의 네트워크가 훨씬 더 촘촘하게 발전하였다. Hammel-Kiesow, Die Hanse, pp. 32-34.
발트해 남쪽과 동쪽 지역에 대한 동식민운동과 도시건설은 교역의 확대에 상호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von Brandt et al., Die Hanse, p. 495.
서유럽에서 시참사회의 정책이 교역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후, 차츰 발트해의 도시들도 그 영향을 받았다. 그와 같이 전환되는 국면에서 고트란트 대상조합의 설자리는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Kattinger, Die Universitas der Gotlandfahrer, p. 63.
또 상업 업무에서 문서를 통한 교역이 확대되면서 계절에 따라 이동하던 상인들의 역할이 축소되었다. 이제 특권적인 원거리교역체제가 도시들 위주로 재편되어 통상적인 네트워크의 수립이 완성되었다. 14세기에 대상조합이 도시들에 의해 밀려나고 상인한자에서 도시한자로 이행이 이루어졌다. 결국 한자 상인의 정주경향으로 인해 뤼벡을 중심에 두고 서쪽으로는 런던과 브뤼헤, 동쪽으로는 노브고로드, 북쪽으로는 베르겐으로 대표되는 네 개의 상관(Kontor)체제가 확립되었다. von Brandt et al., Die Hanse, pp. 492-494.
4. 결 론
북해와 발트해를 연결하는 동서간의 원거리교역의 네트워크는 뤼벡의 건설로 상징되는 한자의 성립으로 말미암아 출현한 것이 아니었다. 카롤링시대 이후 해상교역의 중심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원거리교역의 네트워크들은 지속적으로 발전을 거듭해 왔으며, 정기시 와 도시의 성장에 힘입어 동서교역이 확대되었던 것이다. 12세기 이후 북유럽의 교역망이 촘촘해지고, 집중되고, 다양화되었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새로이 출현한 현상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Hammel-Kiesow, Die Hanse, pp. 24-25.
상인들은 북유럽지역을 무대로 오랫동안 집단적으로 교역을 수행해 왔지만, 11세기까지 그들의 내부 조직을 상세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후에 고트란트 대상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미 앞선 시기에도 교역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여행은 대부분 분명한 목적과 전략을 갖고 이루어졌고, 조직 내에 외지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타개할 대표 혹은 권위도 확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Stein, "Kaufmannsgenossenschaften," p. 573ff.
뤼벡의 건설 이전에는 사료에서 도시들간의 연결을 관찰할 수 있을 뿐 개별 상인집단간의 네트워크의 존재를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상인들의 적극적인 활동이 없었다면 상업중심지들 사이의 연결은 불가능하였다.
좀더 앞선 시기의 교역 및 상인들의 활동이 규명된다면, 한자의 기반이 어떤 발전을 거쳤으며, 특히 바이킹의 활동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었는지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한자의 성격이 “독일 한자”보다는 “북유럽의 한자”로 자리매김될 수 있을 것이다. 한자의 역사에서 독일인들이 이룬 업적은 뒤늦었지만 적극적으로 기존에 존재했던 네트워크에 참여하여 보다 안정적인 네트워크를 구축한 일이었다. 사자공 하인리히는 외부의 침입에도 견딜 수 있는 “한자의 여왕” 뤼벡을 건설하였으며, 그와 더불어 대대적인 선박건조를 후원하여 북해와 발트해를 무대로 네트워크를 원활하게 연결하고 운용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고트란트 대상조합은 이 보강된 네트워크의 주축세력이었다. 결국 한자의 비약적인 발전에는 안정적 네트워크의 확립과 운용이 관건이었으며,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조망할 때 한자의 장구한 역사가 보다 일관되게 설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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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3.12.26
  • 저작시기2013.12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89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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