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운동사] 당재건운동 - 이재유 그룹을 중심으로 (1930년대 초 당재건 운동, 이재유 그룹의 당재건 운동, 이재유 이후의 당재건 운동,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한계와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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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민족운동사] 당재건운동 - 이재유 그룹을 중심으로 (1930년대 초 당재건 운동, 이재유 그룹의 당재건 운동, 이재유 이후의 당재건 운동,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한계와 의의)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1930년대 초 당재건 운동

Ⅲ. 이재유 그룹의 당재건 운동
 1) 이재유, 운동의 시작
 2) 이재유 그룹의 형성과 활동
  ① 경성트로이카 시기 - 1기
  ② 경성재건그룹 시기 - 2기
  ③ 경성재건그룹 시기 - 3기

Ⅳ. 이재유 이후의 당재건 운동
 1) 경성콩그룹
  ① 경성콩그룹의 조직과 활동
  ② 경성콩그룹의 정치방침과 조직운영

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한계와 의의

Ⅵ. 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지도자이면서 기관지편집을 책임지고 있던 박헌영을 정점으로, 각 지역에 산재해 있는 활동가들을 견인하여 지역차원에서의 혁명적 대중조직의 건설에 우선적인 역량을 투입했다. 이때 각 지역 간의 활동가 파견, 출판물 교환, 뉴스의 교환 등은 있었으나 엄격히 말해 하나의 조직체계 안에 있는 지도·피지도 관계는 아니었다. 조직문제의 측면에서 볼 때 지역 나름대로 상대적 독자성이 있었던 것이다. 다만, 박헌영을 중심으로 주요 지도자들의 정치적 지도는 관철되고 있었다.
지도부의 운영방식을 보면, 최고 지도부가 민주집중제 원리에 입각하여 방침을 결정하고 지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박헌영 개인의 판단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박헌영은 주로 조직부 책임자인 김삼룡을 매개로 활동가들과 접촉하고 각 지역을 통제했다. 이러한 운영방식은 당시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조직발전 수준을 대변한다. 달리 말하면, 인물 중심의 조직지도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조직의 최고 지도자인 박헌영이 기관지 편집을 담당했다. 조직과 사상적 지도의 기능을 분리시키지 않고 통일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이밖에 경성콩그룹은 교양과정에서 단련된 성원들을 중심으로 공장반을 결성했다. 공장반원들은 ‘강좌반’ 과정을 이수한 노동자들로서 경성콩그룹의 기관지 또는 초보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정치교육을 받았다. 학생들에게는 반일민족의식을 강조하면서 수준 높은 학습교재를 가지고 토론식으로 그들의 의식을 고취시켰다. 학생들의 경우 교육장소는 주로 가두 연락장소 부근이나 주거지였다.
경성콩그룹은 이와 다른 차원의 조직원 양성도 시도했다. 가령 김순용처럼 ‘전위운동’에 종사할 사람에게는 집중적인 정치의식 함양을 위한 지도·교양을 실시했다. 각 사업부분의 지도적인 위치에서 활동할 사람들에 대해서도 같은 교육방식을 취했다. 김순용과 김응빈은 가두 연락장소 부근에서, 이주상은 인천의 아지트에서 교양교육을 받았다. 이처럼 조직원에 대한 교육·훈련 내용의 차이는 질이 다른 차원의 조직과 전망에 따른 것이었다. 신주백,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도서출판, 2005, 145~160쪽
Ⅴ.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의 한계와 의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일정한 한계를 내재하고 있었다. 당재건을 위한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이 운동의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일제 탄압기구의 유례없는 효율성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들이 일제하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약점들을 궁극적으로 청산한 것은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재건운동은 1930년대와 40년대 전반기가 일제의 파쇼 파쇼 : 이탈리아어. 파시즘적인 운동, 경향, 단체, 지배 체제를 이르는 말.
적 테러통치가 극성을 부린 시기였기 때문에 광범위한 태중투쟁의 양상을 띠면서 전개되지는 못하였다. 게다가 일체 합법적 운동영역이 봉쇄된 조건에서 비합법의 지하운동 형태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재건 운동은 우리나라 민족 해방운동의 유기적인 일부였으며, 민족해방운동 발전의 합법칙성을 반영한 운동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광범위한 대중을 항일투쟁에 일으켜 세울 혁명운동의 참모부를 건설하기 위한 운동이었다. 그것은 또한 일제의 강압으로 인해 당시 모든 합법영역의 운동이 질식 상태에 빠져있고, 민족개량주의자들이 일제에 대한 전면적 예속의 길로 치닫는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의 그날까지 부단히 노력해 온 운동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우리나라 민족해방운동 전통의 중요한 일부로 평가 되어야 할 것이다.
Ⅵ. 맺음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이 벌어진 시기는 역설적으로 한국변혁운동의 역사상 가장 활력이 넘쳐나던 시기였다. 하지만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조선공산당의 재건에도 성공하지 못했고 조선 혁명을 이루는 데도 성공하지 못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이 운동은 실패한 운동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해방의 희망을 잃고 민족해방운동을 포기한 시기에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의 꿈을 이루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헌신한 거의 유일한 대안이라고 볼 수 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에서도 재건 운동을 벌이던 사회주의자들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라는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반공이데올로기가 온 나라를 뒤덮고 대한민국 정통성을 상해임시정부에서만 찾으려 했던 남한의 경우, 조선공산당을 깊이깊이 묻어버렸다. 오로지 반공적인 시각에서 쓴 공산주의운동사 책만이 몇몇 연구자들 사이에서 읽히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1980년대 이후‘진보적’역사인식을 갖추기 시작한 연구자들 덕분에 식민지시대 사회주의운동사는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지만, 지금도 남한‘공식 역사’는 완강하게 조선공산당을 거부하고 있다. 최규진, 「잃어버린 기억 조선공산당」, 『내일을 여는 역사』10호, 서해문집, 2002.
꼭 일본이 역사를 왜곡한다고 그것만을 부정하고 욕할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의 이러한 아픔을 보면서 다시금 반성하고 깊게 생각할 일이 아닐 수 없다. 많이 아쉬웠던 점은 아직도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나 자습서에는 사회주의운동가들의 자세한 내용이 안 나와 있다는 점과 또한 아직도 몇몇 학자들에게서만 연구된다는 점이 아쉬웠다. 앞으로는 우리도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꼭 한번은 역사의 한 면만을 보는 것이 아닌 그 뒷면도 봤음 하는 바람이다.
참고문헌
최규진, 「식민지사회 사회주의운동의 경험과 유산」,『지구화시대 맑스의 현재성』2, 문화과학사.
최규진, 「잃어버린 기억 조선공산당」, 『내일을 여는 역사』10호, 서해문집, 2002.
김경일, 『이재유 연구 : 1930년대 서울의 혁명적 노동운동』, 창작과비평사, 1993.
김경일, 「경성콩그룹과 지방조직」, 한국사회사학회, 사회와역사 제42권, 1994.
신주백, 『1930년대 국내 민족운동사』, 선인, 2005.
신주백, 「박헌영과 경성콩그룹」, 『역사비평』, 역사비평사, 1991년 여름호(통권 15호), 1991.
안재성, 『경성트로이카』, 사회평론, 2004.
안태정, 「이재유의 혁명노선과‘좌익전선’운동」, 『역사비평』, 1991년 가을호(통권 14호.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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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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