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화 -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와 비쉬정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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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프랑스 문화 -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와 비쉬정권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나치 점령하의 프랑스와 비쉬정권
2.점령하의 부역자와 부역행위
3.해방과 나치부역자 처리과정
4.페탕과 라발의 재판

본문내용

이 되어 전쟁수행을 위한 온갖 요구를 담당하였을 때 이미 그의 길은 부역자의 운명일 수밖에 달리 있었을까.
(2)라발의 부역행위
독일의 전격적인 침공과 프랑스의 결정적인 패퇴에 따라 페탕이 수상으로 취임하였을 때에도 라발은 각료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휴전조약이 체결된 직후에서야 페탕은 라발이 국무장관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는 이를 수락하였고 경험과 능력을 발휘하여 비쉬정부의 탄생에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었다. 이 과정에서 라발은 실제 '킹 메이커' 이상이었다. 1940년 7월 10일 그는 능숙하게 국민회의(National Assembly)를 요리함으로써 페탕을 국가주석으로, 그리고 자신은 부주석 및 행정부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하여 그는 페탕을 수상의 직위로부터 밀쳐낸 셈이었다. 라발은 제3공화국하에서도 수상이었지만 의회와 언론의 반대와 비판없이 권력을 행사해 본 적은 없었다. 페탕에게 국가주석이라는 영광을 누리게 하면서 자신은 실질적 권력을 누리면서 독일과의 부역의 길을 추진하였던 것이다.
라발은 아베츠를 포함하여 독일측 대표들과 가장 긴밀히 접촉하고 협상한 사람이었다. 심지어 파리에 주재한 이들과의 접촉과 협상내용은 제대로 페탕에게 전달조차 되지 않았다. 라발은 독일 요구의 창구였던 셈이다. 이러한 요구는 대체로 모두 수용되었다. 라발은 자신이 없었더라면 사태는 훨씬 악화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그 주장을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오히려 당초 내려진 무거운 점령조건은 그대로 개선되지 못하였고 새로운 양보가 줄을 이었다. 프랑스인의 소유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 동광 광산을 독일에게 팔도록 강제하는가 하면 전쟁 막바지에 벨기에 정부가 프랑스정부에게 안전하게 보관해 줄 것을 위탁한 다량의 금괴를 북아프리카로부터 파리로 옮기게 하여 나치독일이 압수할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양보와 우호적인 조치로 프랑스가 최종의 평화협정에서 안전하게 남도록 해 달라는 요구를 하였으나 히틀러와 독일은 언제나 애매한 약속만을 할 뿐이었다.
페탕에게도 라발은 불만스런 존재였다. 이 노원수(老元帥)를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남겨놓고 라발이 정부의 실질적인 권력을 좌지우지 하고 있다는 의심을 가중시켰다. 더구나 직업군인 페탕과 직업 의회주의자 라발 사이에는 개인적 차이와 반목도 심각하였다. 비쉬정권의 다른 각료들 가운데 라발을 좋아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비엔나에 잠들고 있던 나폴레옹의 아들 시신을 파리의 아버지의 무덤으로 옮기는 행사에 모든 각료들을 제외하고 페탕만을 초청한 사실을 두고 라발에 대한 불만이 높아지고 해임을 위한 공모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각료들의 건의에 설득당한 페탕에 의해 1940년 12월 13일 라발은 갑자기 해임된다. 이것은 라발이 지나치게 적극적인 부역행위를 추진하였고 페탕이 이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생겨난 자연스런 결과로 이해되어 왔다. 그 이전인 10월 24일의 Montoire에서의 히틀러와의 회담은 라발의 부역혐의를 강화시킨 사건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다른 대안이 없던 나치는 1942년 4월 17일 다시 라발을 부수상으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한다. 라발은 보다 확신을 가진 각료들을 심었다. 러시아 전선에서의 곤경은 나치로 하여금 보다 많은 무기공장 노동자들을 요구하였다. 프랑스를 포함한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노동자의 강제징용의 시작이었다. 프랑스에 대해서는 3명의 숙련노동자에 대하여 1명씩의 프랑스군 포로 귀환이라는 교환조건이 제시되어 24만명의 프랑스 노동자들이 독일로 향했다.
(3)전후 라발의 부역 재판
라발은 독일의 Sigmaringen에서 스위스로 탈출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그대신 스페인에 3개월간 체류할 허가를 받았다. 나치의 도움으로 연합군의 체포를 면하고 독일 비행기로 스페인으로 날아갔다. 프랑코의 환대를 기대하였으나 스페인은 1994년 7월, 그를 독일로 축출하였고 거기서 미군에게 체포되어 다시 프랑스군에게 인계되었다. 라발이 도망자 신세로 있을 때 프랑스 사법당국은 그를 궐석으로 재판할 계획도 세웠으나 그의 체포로 또하나의 국가적 이벤트가 가능하게 되었다.
페탕의 재판에 증인으로 나타 증언을 하기도 하였으나 자신의 재판은 1994년 10월 초순이 되어 시작하였다. 예비심문 과정에서 그 심문 기간이 이례적으로 짧다는 항의서한에서 라발은 "다른 사람이 용감하게 프랑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동안 나는 4년동안 불행했던 조국의 생존을 위해 공헌했다" "진실이 모두 공개되면 나의 애국심과 용기는 결코 의심할 바 없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재판장과 검사는 페탕 재판에서와 마찬가지로 Mongibeaux와 Mornet였다. 36명의 배심원이 선출되었는데 18명이 레지스탕스 출신이었고 나머지 18명은 의회 의원들이었다.
Naud와 Baraduc 두사람이 변호인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변호사이자 경험많은 의회 의원으로서 그는 판사, 배심원, 검사등을 자극하면서 자신을 능숙하게 방어하였다. 이러한 능숙한 자기 방어는 오히려 재판관계자의 분노를 샀다. 이러한 분위기는 그래도 권위와 엄숙함을 지켰던 페탕 재판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재판관계자와 배심원, 방청객 모두가 가장 악질적 부역자로 라발을 낙인찍고 있었다. 따라서 라발의 재판은 페탕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속전속결로 진행되었고 보복적인 악의에 기초해 있었다. 모네 검사는 라발의 범죄는 1940년 이래 공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더 이상 증거가 필요없다고까지 주장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 반발하여 라발은 '사법적 범죄의 희생자'를 만들 것이라는 이유로 출정을 거부하는 사태도 벌어졌다. 그러나 이미 예정된대로 재판은 진행되어 10월 9일 사형선고를 받았다. 드골은 재심 신청을 거절하였고 사형을 그대로 추인하였다.
교도소 관리가 그를 총살시키기 위하여 데리러 왔을 때 코트 안에 숨기고 있던 시아나이드를 삼켜 병원으로 실려가는 소동을 빚기도 하였다. 그는 '프랑스의 총탄'으로 죽고 싶지 않다고 말하였다.위 세척을 받은 후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사형집행절차가 강행되었다. 이윽고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닥아와 그는 '프랑스 만세'를 외치고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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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4.27
  • 저작시기2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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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965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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