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대 중국 소련 외교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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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한의 대 중국 소련 외교정책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북한 외교정책 결정요인 (대 중,소)
1. 북한 외교정책 결정요인
1) 북한 외교정책 결정의 국제적 환경 요인
2) 지정학적인 측 면

2. 중,소 대립의 요인과 성격
1) 중,소분쟁의 배경과 격화되어가는 과정
2) 중소대립의 요인
3) 북한 외교정책과의 관계

Ⅱ. 북한의 자주노선과 중•소 외교정책
1. 북한 자주노선의 중,소 외교정책에 있어서의 의미
2. 북한 자주노선의 한계점

Ⅲ. 북한의 대중, 소 외교정책의 변화과정
1. 대소일변도추종기(1945.8~1950.10)
2. 대중, 소 균형적 밀착기(1950~1956)
3. 대중, 소 소극적 중립기(1956~1961)
4. 대중공편향기(1962~1964)
5. 대소편향기 (1965~1968)

본문내용

하였다. 또한 북한이 소련과 멀어지게 된 수많은 사건들 중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1962년 10월 쿠바미사일 사건
1962.10.20 중국과 인도 국경분쟁 이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과 소련이 악화되었고, 이에 따라 친 중국노선을 취한 북한도 소련과 멀어지게 되었다. 소련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으나 인도에 대해서 계속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다.
중국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인도였기에 중국과 소력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될 수 밖에 없었다
후르시초프가 실각되기까지 짧은 기간 동안 북한과 소련과의 관계를 갈라놓고 중국과의 관계를 밀접히 하여주는 사건들이 연달아 발생하였다
‘쿠바사태’, ‘중,소국경논쟁’으로 인해 북한이 중,소 사이에서 중립적 태도를 취함으로 계속이득을 볼 수 있는 입장이 못 되었다.
-이런 과정으로 북한은 소극적으로 소련을 비난하던 태도를 지양하고 중국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소련을 적대시하기 시작했다.
■<이런 북한에 대한 소련의 태도>
-소련은 북한의 대중공편향정책을 못마땅하게 여김
-북한에 대한 모든 군사원조 및 경제원조 중단
→그래서 북한은 소련과의 관계악화로 경제, 군사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자력갱생’과‘국방에서의 자위’를 내세우기 시작함.
■ <북한의 이 시기 친중국적 태도표현의 이유>
①중국의 제 3세계외교가 활기-중국의 3세계 침투에 편승하여 외교적 지위를 강화하고자 하기 위하여
②1964년 중국의 제1차 핵 실험 시행-중국의 군사적 능력과 국제정치적 영향력에 대해 큰 기대와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
∵이시기 북한의 이러한 소극적이고도 적극적인 이유에서 친 중국으로 편향하는 정책으로 소련과 동구제국으로부터 격리되어갔음.
5. 대소편향기 (1965~1968)
■이 기간은 지난 3년 동안 진행되었던(1962~64) 북한의 친중공외교노선이 친소노선으로 복귀하게되고 상대적으로 중국과의 관계는 소원해지는 시기이다.
▶이 같은 노선은 북한 스스로의 이익추구를 위해 택하게 된 것이다
북한 입장에서는 아직도 국제정치면에서나 공산진영 내에서 ‘소련의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북한이 대중국편향정책(이전 3년간 행했던)은 실리라는 면에서 볼 때 큰 타격을 주는 것이었다.
이전 시대의 친 중국편향정책으로 북한은 북한이 받아들인 외국원조의 비율중 20%를 공한바 있는 동구공산국들로부터도 고립을 자초한 것이 되었다.
그런데 북한이 대중, 소 정책에 있어서 정작 필요로 하는 것은 (노리고 있는 것)
‘경제, 군사원조’였다. 그래서 소련의 후르시초프 실각 후 ‘브레즈네프’와 ‘코시킨’을 수반으로 하는 친정권이 수립되자, 북한은 10월 혁명 47주년기념식에서 고위대표단을 파견하여 ‘대소관계개선’을 꾀하려 하였다.
북한은 잠시나마 중국과의 편향으로 소련과 북한간의 관계악화에 따른 그들에 대한 소련 및 동구제국의 원조중단을 가져왔기에 북한에게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특히 군사적으로 견디기 힘든 상황을 조성케 하였다.
반면 한국은 5.16혁명이후 정치, 사회적 안정을 굳히고 있었고
1965년 한, 일국교정상화 이후 한국의 경제는 새로운 발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었고
한국군의 월남파병으로 한, 미 동매관계도 굳게 발전하고 있었다.
▶ ‘흐루시초프’의 실각은 소련과 북한간의 재접근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소련수상‘코시긴’을 단장으로 하는 소련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소련과 북한간의 재접근이 이루어졌다. ‘코시긴’의 평양방문은 소련수뇌로서는 처음의 일이기 때문에 김일성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면서 북한은 소련의 원조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였다.
북한은 지난 3년간 중국에 대한 편향정책으로 대소관계악화의 결과로 동구공산국들과 관계를 악화시켰으며, 국제적으로는 소련의 지원을 완전히 단절시켰다. 그렇기 때문에 중공 밀착기를 통해서 중국은 공산권내에서 북한을 고립시켰고, 소련과 동구로 부터의 원조만 잃었던 손실에 대한 보상을 중국으로부터는 받지 못했기 때문에 소련에 접근할 필요를 다시 느끼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국의 경제개발계획이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데다가 국외월남파병과 1965년 한, 일회담타결로 한국의 경제발전의 전망이 밝아졌기에 이에 불안해진 북한은 소련으로부터의 군사, 경제원조의 필요성을 더욱 실감하게 된 것이다.
게다다 이 시기는 중국의 문화혁명기시기로 쌍방간에 더욱 냉각될 수 밖에 없었다. 이같은 상황하에 경제적 실리와 현대무기를 갈구했던 북한은 소련과의 관계개선으로 그 요구를 어느정도 충족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북한은 중, 소의 압력으로부터 스스로 방어하기 위해 1966년 8월 자주성을 표방하고 나서자(‘자주노선’은 어느 한 세력과의 밀착을 기피하는 경향을 띄고 중, 소 적대관계 속에서 북한외교의 어려운 입장을 합리화 하고, 이런 자주노선에서 나타난 것을 보면 소련보다도 오히려 중곡당정책인 공산주의세계에 미친 분열적인 악영향에 훨씬 더 많은 공격을 한 것이기 때문에) 중국도 1967년에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지도자를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불협화음 속에서 북한과 중국은 약간의 관계개선이 있었다
-1968년 3월 4일에 중국과 북한 간에 통상협정을 체결하였고
-7월10일에는 북한, 중국 간의 군사우호협정체결7주년을 기념하여 중국주재북한대사관에서 연회가 베풀어졌으며 다음날 7월 11일 노동신문은 지난날 조선은 중국인민들의 위업을 도와 중국인민들과 함께 피흘려 싸웠으며 우리는 이것을 잊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중국이 북한을 도운 것은 과거 조선인민이 중국을 도와준 때문이라는 의미를 암시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은 자연히 북한 중국간의 관계가 회복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기간동안 중국이 공식적으로 북한정권이나 김일성을 혹평하지는 않았다.
결과적으로 북한은 소련과의 접근으로 중국의 불만을 유발하고 중국과 불화하기는 하였으나 중국과의 결별은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실리적인 면에서 소련과 재접근을 하기 시작한것이지, 이념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중국과 동질성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이시 중국과 적대관계에 까지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북한은 1969년부터 자주노선을 견지하면서 중, 소와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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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5.05.26
  • 저작시기2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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