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아시아 레포트-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인식 차이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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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남아시아 레포트-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자군 전쟁에 대한 인식 차이에 대하여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십자군 전쟁의 배경과 과정
Ⅲ. 기독교의 입장, 성전(聖戰)
Ⅳ. 이슬람교의 입장, 침략(侵略)

본문내용

왕조는 시리아와 이집트로 분열되어 있었다.)와 동맹을 맺은 십자군은 라 포르비에(La Forbie) 전투에서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와 호라즘군에게 포위섬멸 당한다. 라 포르비에 전투는 하틴의 뿔 전투 이후 팔레스타인 지역의(즉 유럽에서의 원정군이 아닌) 십자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유일한 사례였으며 최후의 사례이기도 하다.
- 제 8차 십자군 전쟁 : 1268년, 바이바르스가 이끈 이슬람 군대가 안티오크 공국을 공격해 멸망시키자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다시 십자군을 결성하여 북아프리카 튀니지를 공격한다. 이에 동생인 시칠리아 왕 샤를(카를로 1세), 사위인 나바라왕 테오발트 2세 등이 원군으로 출병하나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식수부족과 진중에 전염병이 돌아 루이 9세는 튀니스에서 병사한다. 또 나바라왕 테오발트 2세도 귀국한 후 이내 병으로 사망했고 남겨진 샤를은 튀니지와 기독교인의 보호와 무역재개, 배상금 지불등의 조건으로 화목하고 뒤늦게 지원군으로 온 에드워드 1세와 아크레로 향했다.
- 제 9차 십자군 전쟁 : 루이 9세가 튀니스 공격에 실패하고 병사하자 지원군으로 왔지만 시기를 놓쳐 제대로 싸우진 못했던 잉글랜드 왕국의 에드워드 왕자(후에 에드워드 1세, 재위 1272~1307)와 남겨진 시칠리아 왕 샤를이 십자군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로 진군하였고 키프로스왕 위그 3세가 해군을 지원을 해주었다. 또 일 한국(1258~1353)에 원군을 요청하여 기병대를 지원받는다. 몇몇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바이바르스가 키프로스 본토를 기습하여 키프로스 해군이 철수하게 되고 에드워드의 군대는 아크레에 고립되고 만다. 또 술탄 바이바르스가 암살자를 보내 에드워드를 습격하기도 했는데 암살자를 죽이는데 성공하지만 에드워드도 작은 부상을 당하게 된다. 갖가지 악전고투속에 결국 에드워드와 샤를은 바이바르스와 10년간의 휴전 협상을 맺고 1272년 철수하고 만다. 이 후 십자군은 맘루크 왕조의 거듭된 공격으로 토르토사, 트리폴리 등을 잃었으며(1289) 십자군을 지원하는 몽골군은 아파미아, 알레포 등을 공격하며 서남쪽 방향으로 진격하면서 많은 무슬림들을 학살하나 이집트 술탄 칼라운이 반격을 개시하여 몽골군을 몰살시킨다. 그 때 십자군은 쿠칸에서 패배하였으며 최후의 거점인 아크레가 함락(1291)당하여 중동에서 십자군의 거점이 될 만한 곳은 모조리 파괴되어 200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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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이지수6페이지
  • 등록일2016.03.14
  • 저작시기2015.6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997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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