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강력히 추진하고, 특히 천리마운동을 통해 종파주의·지역주의·가족주의 제거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 결과 정치적인 반대세력을 확고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원래 중공업 우선 경제정책은 내적 축적이 없이는 추진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같은 대중운동을 병행한 결과 정책의 정당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o 또한, 대중운동과 함께 당 우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일부 지방에서 관료주의나 형식주의 등 반기를 들었지만 김일성은 현장지도 등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확인하는 방식을 취해나갔다. 청산리 방식이나 대안의 사업체계 등이 바로 주요 사례이다. 이를 통해 당 중앙위의 정책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정치문화를 확고하게 다져가면서 북한은 점차 소련이나 중국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형태의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에서 경제정책이 물질적 유인정책이었고, 중국에서는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정책이었다면, 김일성은 물질적 유인과 이데올로기적 유인을 병용하는 유연한 정책을 통해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낸 것이다.
2. 의문사항
o 북한에서 지연·혈연 등 연고주의 타파는 1958년 3월 이후 전재된 반종파 투쟁에서 부터였다. 부정부패와 함께 사회적국가이익을 침해하며 개별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 이기주의와 조직 이기주의를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이와 관련된 세력을 척결함으로써 북한에는 일찍부터 연고주의가 발붙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과 그의 가족들은 당정군의 핵심 지위를 차지하며 가족주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부수상을 차지하고, 김정일은 당에서, 부인인 김성애는 여맹에서 김일성의 후광을 배경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나 문제제기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독재권력이 50년 이상 유지되고 세습되는 상황과는 달리 초창기 지식인층에서 문제제기 조차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3. 성과와 한계
o 김일성 리더십 전반부는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북한식 독재체제의 형성과정을 정치·경제적 상황과 정책구현 과정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56년 종파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당의 정책에 대해 의사표현과 토론이 가능했으나, 반종파 투쟁을 통해 가족주의·지방주의·연구고의를 척결하고, 당의 지도를 리단위까지 전개하면서 당의 역할은 관료와 기술관리층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천리마운동작업반 운동을 통해 공산주의적 문화를 주민들 일상생활까지 침투·심화시키면서 북한에는 당의 방침에 어긋나는 의견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또한, 김일성에 대한 도전현상도 현지지도를 통한 당과 대중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방식에 의해 소멸되게 되었다. 곧 북한에서 유일사상체제와 수령제가 형성되는 중요한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o 특히, 북한의 정치사회적 특징을 형성하는 데는 인민군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인민군은 한국전쟁시기까지는 김일성의 권력 호위세력으로 기능을 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조선노동당의 군대로 당의 방침을 관철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며 여타부문에 대한 지도를 담당했으며, 특히 군대의 속성인 무력 차지는 곧 권력의 지속을 보장하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었다. 62년 경제·군사 병진노선이 경제정책 실현에는 심각한 차질을 초래했음에도 정치적 위기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은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군대장악이라는 측면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4. 문제제기
o 종파사건 이후 시행된 제1차 5개년 계획은 중공업 우선 경제정책으로 외부 자본의 도입 없이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으로부터 지원은 기대에 못미치는 4억 루블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 정책을 추진했고, 자본 축적의 약점을 대중운동으로 극복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3년만에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후에 경공업과의 심각한 불균형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시기의 경제성장은 괄목할 수준이었고 북한경제의 부흥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병행된 반종파주의, 당적 지도 강화 등은 전쟁 후 잔재하고 있던 봉건잔재를 탈피하고 당 우위 국가로서의 기틀을 확고히 하고, 김일성 권력의 정당성을 높이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연구자들은 이 같은 리더십이 항일무장투쟁기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는데, 당시 분단이라는 요인도 나름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서, 분단이라는 상황이 북한의 정치·경제 정책, 그리고 김일성 독재체제에 미친 영향을 어느 정도였는지도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o 또한, 대중운동과 함께 당 우위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일부 지방에서 관료주의나 형식주의 등 반기를 들었지만 김일성은 현장지도 등을 통해 대중적 지지를 확인하는 방식을 취해나갔다. 청산리 방식이나 대안의 사업체계 등이 바로 주요 사례이다. 이를 통해 당 중앙위의 정책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정치문화를 확고하게 다져가면서 북한은 점차 소련이나 중국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형태의 사회주의 독재국가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에서 경제정책이 물질적 유인정책이었고, 중국에서는 이데올로기에 치우친 정책이었다면, 김일성은 물질적 유인과 이데올로기적 유인을 병용하는 유연한 정책을 통해 대중들의 호응을 얻어낸 것이다.
2. 의문사항
o 북한에서 지연·혈연 등 연고주의 타파는 1958년 3월 이후 전재된 반종파 투쟁에서 부터였다. 부정부패와 함께 사회적국가이익을 침해하며 개별적 이익을 추구하는 개인 이기주의와 조직 이기주의를 대대적으로 단속하고 이와 관련된 세력을 척결함으로써 북한에는 일찍부터 연고주의가 발붙일 수 없게 된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과 그의 가족들은 당정군의 핵심 지위를 차지하며 가족주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부수상을 차지하고, 김정일은 당에서, 부인인 김성애는 여맹에서 김일성의 후광을 배경으로 권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시 북한에서 이에 대한 비판이나 문제제기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미 독재권력이 50년 이상 유지되고 세습되는 상황과는 달리 초창기 지식인층에서 문제제기 조차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3. 성과와 한계
o 김일성 리더십 전반부는 그동안 이해하지 못했던 북한식 독재체제의 형성과정을 정치·경제적 상황과 정책구현 과정을 통해 설명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56년 종파사건 이전까지만 해도 당의 정책에 대해 의사표현과 토론이 가능했으나, 반종파 투쟁을 통해 가족주의·지방주의·연구고의를 척결하고, 당의 지도를 리단위까지 전개하면서 당의 역할은 관료와 기술관리층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천리마운동작업반 운동을 통해 공산주의적 문화를 주민들 일상생활까지 침투·심화시키면서 북한에는 당의 방침에 어긋나는 의견이 자취를 감추게 된 것이다. 또한, 김일성에 대한 도전현상도 현지지도를 통한 당과 대중의 결합이라는 독특한 방식에 의해 소멸되게 되었다. 곧 북한에서 유일사상체제와 수령제가 형성되는 중요한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o 특히, 북한의 정치사회적 특징을 형성하는 데는 인민군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인민군은 한국전쟁시기까지는 김일성의 권력 호위세력으로 기능을 했고, 한국전쟁 이후에는 조선노동당의 군대로 당의 방침을 관철시키는 기능을 수행하며 여타부문에 대한 지도를 담당했으며, 특히 군대의 속성인 무력 차지는 곧 권력의 지속을 보장하는 장치로 기능할 수 있었다. 62년 경제·군사 병진노선이 경제정책 실현에는 심각한 차질을 초래했음에도 정치적 위기로 성장하지 못했던 것은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군대장악이라는 측면이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4. 문제제기
o 종파사건 이후 시행된 제1차 5개년 계획은 중공업 우선 경제정책으로 외부 자본의 도입 없이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으로부터 지원은 기대에 못미치는 4억 루블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중공업 우선 정책을 추진했고, 자본 축적의 약점을 대중운동으로 극복하는 리더십을 발휘하여 3년만에 달성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후에 경공업과의 심각한 불균형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시기의 경제성장은 괄목할 수준이었고 북한경제의 부흥기라고 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병행된 반종파주의, 당적 지도 강화 등은 전쟁 후 잔재하고 있던 봉건잔재를 탈피하고 당 우위 국가로서의 기틀을 확고히 하고, 김일성 권력의 정당성을 높이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 연구자들은 이 같은 리더십이 항일무장투쟁기의 전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하는데, 당시 분단이라는 요인도 나름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면서, 분단이라는 상황이 북한의 정치·경제 정책, 그리고 김일성 독재체제에 미친 영향을 어느 정도였는지도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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