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공산주의 운동사2 해방 후편(1945-53) 4~6장 - 조선인민공화국의 출현 미국의 초기 정책 한국의 좌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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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2 해방 후편(1945-53) 4~6장 - 조선인민공화국의 출현 미국의 초기 정책 한국의 좌익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본문내용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미국이 했던 행위를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강하다. 좌우합작에서 “미국은 결실을 맺으려고 최선을 다했다”(p. 364)고 언급하고 남한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억제한 것을 미국의 공으로 서술(p. 397)한다. 이에 반해 남북 분단의 상황과 전쟁이 벌어진 것을 소련이 북한을 시켜서 일어난 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소련이 한국의 공산주의 운동에 대해 기본 결정을 내린 것과,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북한 정치에 개입해 북한의 정치 상황을 안정적으로 만들고, 전쟁을 대비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해방 후 한반도를 둘러싼 많은 사실의 원인에 대한 방점이 소련에 찍혀 있는 것은 견지할 필요가 있다. 미국과 소련, 남과 북의 복잡한 힘이 작용했을 것이고 복합적인 원인을 분석할 필요가 있는데 이 책은 소련의 단독 원인 제공에 무게를 싣고 있다.
또한 공산당 내의 파벌투쟁이 극심했던 것을 식민지 시대와 역사적 배경에 근거하기 보다는 한국 민족의 독선적이고 교조적(dogmatic)인 성격 때문이라는 다소 편파적인 시각이 있었다. 특히 한국전쟁이 발발한 과정과 전쟁 중 북한이 세균전 등으로 미국을 비방한 내용, 전 후 박헌영 일파의 숙청에서 그들이 미국의 첩자 역할을 했다는 북한측 주장에 대해 미국의 입장을 ‘변호’하는 내용이 많다.
Ⅴ. 새로운 문제제기
1. 몽양 여운형에 대한 연구
1945년부터 남한의 모든 정치세력은 좌익과 우익의 합작에 힘을 쏟았으나 결국은 실패했다. 많은 정치인이 있었지만 몽양 여운형은 중간세력으로, 진정한 통일정부는 좌우합작에서 수립될 것이라고 보며, 좌우익을 초월한 민족대표기관을 설치하여 미소공위를 재개시키려 노력했고, 완전한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군정에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인식,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한 우익 주체의 합작동기,”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 29집(2001), pp.377-412. (재인용)
본문에서는 여운형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여운형은 자신이 합작운동의 중심이라고 ‘생각’했고 공산당이 좌익 합당을 위해 노력한다면 자신이 아니라 박헌영이 남한의 정치적 중심에 서게 된다고 보았다(p. 366)고 기술했다. 본문은 여운형을 박헌영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며 좌익과 우익의 사이에서 자신의 입지를 위해 기회를 노린 인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좌익과 우익 모두와 지속적으로 대화하며 미국의 입장에서 다루기 어렵고 방심할 수 없는 인물(p. 363)이라고 평가하였는데, 이는 편향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여운형을 남과 북이 나아가야할 길이 타협이라고 생각했고 좌우 합작을 통해 하나의 단일 공동체로 나아가는 이상을 가진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여운형의 이상이 당시 미국과 소련이 극도로 대치하는 상황이었던 국제 정세를 올바로 분석하지 못하고 식민지 시대를 지나며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 것일 수 있지만 이상을 갖고 민족을 위해 앞장섰던 사람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2. 박헌영의 숙청과 최근 장성택의 숙청의 유사성과 이로 인한 영향력
북한은 한국전쟁 이전부터 정권을 안정화하는데 김일성의 잠재적 경쟁자로 등장하는 많은 정치적 인물들을 숙청했다. 김일성 정권 확립 과정에서 가장 많은 숙청이 이루어진 때가 한국전쟁 후 대부분이 남한 출신인 박헌영 일파를 숙청한 사건이었다. 모반이론은 스탈린식 정치체제 내부의 권력투쟁에 내재하는 거의 필수적인 요소로, 소련의 공산당이 벌인 1937년 대숙청처럼 북한에서도 숙청 작업이 진행되었다. 박헌영과 그의 심복 12명은 김일성 정권의 전복 음모를 꾸미고 이를 위해 군사, 정치 역량을 결집시키기 시작했다는 내용으로 기소되었고 이러한 배경의 진위 여부와 진행 여부, 정도는 불명확하지만 결과적으로 김일성은 자신의 가장 위험한 적수를 숙청하는데 성공했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2013년 12월 12일, 김정은 체제의 핵심 후견 세력으로 꼽히던 장성택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군사전복혐의로 사형에 처해졌고 이후 그의 측근 16명도 처형되었다고 한다. 장성택이 숙청된 과정은 박헌영이 숙청된 과정과 유사한 점이 많다. 장성택은 박헌영 일파에게 한국전쟁의 책임이 전가된 것처럼 현재 북한의 경제가 어려운 데에 일정한 책임이 있는 ‘인민의 원수’로 지칭되었다. 김일성은 박헌영을 숙청한 후 강력한 권력을 쟁취했는데 과연 김정은 체제에도 공포정치를 위시하여 동일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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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등록일2019.02.09
  • 저작시기20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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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번호#108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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