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formula, 벅찬 감동으로 예수가 신이었는데 약속된 메시야였는데 이 신과 동일한 것으로 고백하는것.
ㄱ. 예수를 신으로 보지 못했을때 달아났고 ㄴ. 부활을 통해 공동체가 다시 고백했고 ㄷ. 로마 박해도 이런 선상에서 견딜 수 있었다. 이제 기독교 역사의 토대가 생기게 됨.
3. 성령 오시다.
부활사건이후 제자들은 새로운 인식을 하게됨. 많은 제자들이 돌아오고 이제 예수를 신이라 고백을 하고 이 고백이 공적으로 역사속에서 고백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 전환점이 개인, 내적, 경험을 넘어 공적인 운동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은 사도행전의 성령체험이후이다. 이 체험은 너무나 독특하고 죽음마저 극복하고 조소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사망아 너의 쏘는것이 어디 있느냐?)
이 오순절 사건 바로 이해를 해야. 핵심이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었고 그가 하나님임을 담대히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방언, 치유는 부수적인것들)
이 놀라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기운이 아니라 그 놀라운 분(PERSON)이 있는데 여기에 사로잡힐때 이것을 성령 보혜사(인격)으로 고백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예수와 같다는것을 알게 된다. 이 역사적인 체험은 달랐지만 같은 것은 역사, 보여주시고 같이 함께 하신다는것을 동질성으로 나타나것을 고백하게 됨.
(신학적 정리)
1. 결코 삼위일체를 포기할 수 없다. 기독교 교리가 지금까지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기독교를 만든 근원적 체험, 증언,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것 없이 기독교는 자기 동질성을 상실. 예수가 신이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성령역사에 대한 고백이다. 이것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교리이전에 삼위에 대한 역사적 체험, 이러한 역동적 감동위에 삼위에 대한 이론이 체계화됨. 그러기에 교리적 이론으로 접근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를 이해함으로 우리의 신이해가 살아 있다면 구체활 될 수 있다.
2. 기독교에 의해 생겨난 역사적 구조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냥 우주론적 사고를 유지하면 기독교의 상징 사건이 그냥 반복이 될 뿐이다. (야곱의 돌베게, 우물, 아브라함의 우물, 성상, 성만찬) 이때 신을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것으로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 매일 반복하는 예배가 의미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리고 맞다. 차이는 impetu'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가 아니면 순환론적(자기완결, 자기만족적)으로 가는가가 문제이다.
3. a-삼위의 역동성을 기억하는것이 중요. 몰트만 이론 -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아버지도 함께 고통당했고 through, with, by.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b. 그러면 우리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시대. 그러면 삼위가 분리되고 있느냐? 아리우스적이다. 또 다른 것은 다신론적 우려가 있다.
4. 부르너, 1937, truth as encounter'(만남으로서 진리) - 계시와 믿음의 이원화, 인식의 주, 객도식 극복하려 노력. 부르너는 계시와 믿음의 이원화, 인식의 주객도식 극복하려 노력. 부르너는 계시와 신앙에 대한 오해가 초기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 일어난다. 하르낙도 동의. 부르너는 역사적, 인격적 성서적 계시가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음.
cf) impact ->experience ->text ->canon이됨. canon을 하나님의 절대계시로 인정하는것 교회. 역사적, 인격적인것이 그리스 철학영향으로 개념화가 되어버림. 여기서 이원화(계시/믿음, 주/객) 그래서 하나님이 개념이 되버림. 이 이후 인식론적 이원화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 이런 가운데 믿음은 이해되지 않은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버림. 개념화된 신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것을 명사화, 객관화, 추상화 되어버린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게됨.
부르너는 이 이원론을 해체하려고 시도.
역사적 - 하나님의 진리는 개념, 인식의 대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계시가 무시간적이 아니라 항상 역사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ex)민중개념. 개념화시키면 무시간적이 되어버림. 시공간 안에서 인간에게 happen하는 것이다.
인격적 - ideal을 주는 것 아니고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개념을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주심. 야훼의 말과 행위를 통해 직접 만나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를 통해 예수 자신을 만나야함. 부루너는 역사적, 인격적 인간 설명하며 만남의 신학으로 답변을 시도한다. 성서의 하나님은 한번도 개념화 되지 않음. 항상 행위로 happen하는 것이다.
계시는 movent of verbs'(동사의 움직임)인것 같다. 그 자신도 자주 나는 나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다. 이스라엘도 역사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이해, 믿음. 법궤를 앞세우고 나감. 그러나 전쟁에서 져버림. 법궤자체 의미 없음. 법궤가 상징화되고 명사화 되면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이러다가 다시 성전 중심. 율법규례에 가두어지게 됨(유월절 속건죄, 등등)
A.D70년 기아로 많은 사람이 죽음, 성전무너짐 식인이 나타남. 이런 가운데 성전 재단의 불을 끄지 않음. 그러다가 피난감. 맛사다 전투(모두죽음). 신을 가두지 말고 명사화 시키지 말자. 항상 역사속에서 오늘도 HAPPEN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가두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교리속에 교회속에 하나님 가두고 있는것 아닌가?
이 역사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증언할까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떠나버렸는데 우리 교회만 붙들고 있다면 문제이다.
근본질문. 결국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신학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는가? 역사내적 자기이익, 교회이익 추구하는것 아닌가? 교회지상주의로 나타날수 밖에 없다. 역사속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중요하다. 삼위 하나님이 함께하는 하나님나라 완성이 중요하다. 우리는 왜 이리 게으른가? 칼빈은 게으름을 원죄로 보았다. 타 학문이 우리 시대를 변화시키는데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교회를 통해 SECT화 시킬 것인가? 아니면 성육신, 역사속에 오신 그리스도를 맛보고 여기에 동참,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예언자적 정신이다.
ㄱ. 예수를 신으로 보지 못했을때 달아났고 ㄴ. 부활을 통해 공동체가 다시 고백했고 ㄷ. 로마 박해도 이런 선상에서 견딜 수 있었다. 이제 기독교 역사의 토대가 생기게 됨.
3. 성령 오시다.
부활사건이후 제자들은 새로운 인식을 하게됨. 많은 제자들이 돌아오고 이제 예수를 신이라 고백을 하고 이 고백이 공적으로 역사속에서 고백되는 사건이 나오는데 이 전환점이 개인, 내적, 경험을 넘어 공적인 운동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은 사도행전의 성령체험이후이다. 이 체험은 너무나 독특하고 죽음마저 극복하고 조소하게 만드는 경험이었다.(사망아 너의 쏘는것이 어디 있느냐?)
이 오순절 사건 바로 이해를 해야. 핵심이해.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었고 그가 하나님임을 담대히 고백하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방언, 치유는 부수적인것들)
이 놀라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단순한 기운이 아니라 그 놀라운 분(PERSON)이 있는데 여기에 사로잡힐때 이것을 성령 보혜사(인격)으로 고백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 예수와 같다는것을 알게 된다. 이 역사적인 체험은 달랐지만 같은 것은 역사, 보여주시고 같이 함께 하신다는것을 동질성으로 나타나것을 고백하게 됨.
(신학적 정리)
1. 결코 삼위일체를 포기할 수 없다. 기독교 교리가 지금까지 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것이 기독교를 만든 근원적 체험, 증언, 고백이기 때문이다. 이것 없이 기독교는 자기 동질성을 상실. 예수가 신이다라는 것을 고백하게 하는 성령역사에 대한 고백이다. 이것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교리이전에 삼위에 대한 역사적 체험, 이러한 역동적 감동위에 삼위에 대한 이론이 체계화됨. 그러기에 교리적 이론으로 접근하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알기 어렵다. 그러나 그 의미를 이해함으로 우리의 신이해가 살아 있다면 구체활 될 수 있다.
2. 기독교에 의해 생겨난 역사적 구조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냥 우주론적 사고를 유지하면 기독교의 상징 사건이 그냥 반복이 될 뿐이다. (야곱의 돌베게, 우물, 아브라함의 우물, 성상, 성만찬) 이때 신을 역사 속에서 살아 있는것으로 말할 수 있는가?
그러면 매일 반복하는 예배가 의미가 없는 것인가? 아니다. 그리고 맞다. 차이는 impetu'가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가 아니면 순환론적(자기완결, 자기만족적)으로 가는가가 문제이다.
3. a-삼위의 역동성을 기억하는것이 중요. 몰트만 이론 -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아버지도 함께 고통당했고 through, with, by. 성령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b. 그러면 우리는 세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다. 성부, 성자, 성령의 시대. 그러면 삼위가 분리되고 있느냐? 아리우스적이다. 또 다른 것은 다신론적 우려가 있다.
4. 부르너, 1937, truth as encounter'(만남으로서 진리) - 계시와 믿음의 이원화, 인식의 주, 객도식 극복하려 노력. 부르너는 계시와 믿음의 이원화, 인식의 주객도식 극복하려 노력. 부르너는 계시와 신앙에 대한 오해가 초기 그리스 철학의 영향 아래 일어난다. 하르낙도 동의. 부르너는 역사적, 인격적 성서적 계시가 그리스철학의 영향을 받음.
cf) impact ->experience ->text ->canon이됨. canon을 하나님의 절대계시로 인정하는것 교회. 역사적, 인격적인것이 그리스 철학영향으로 개념화가 되어버림. 여기서 이원화(계시/믿음, 주/객) 그래서 하나님이 개념이 되버림. 이 이후 인식론적 이원화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 이런 가운데 믿음은 이해되지 않은것을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되어버림. 개념화된 신을 의심없이 받아들이는것을 명사화, 객관화, 추상화 되어버린 것을 신앙으로 받아들이게됨.
부르너는 이 이원론을 해체하려고 시도.
역사적 - 하나님의 진리는 개념, 인식의 대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계시가 무시간적이 아니라 항상 역사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ex)민중개념. 개념화시키면 무시간적이 되어버림. 시공간 안에서 인간에게 happen하는 것이다.
인격적 - ideal을 주는 것 아니고 자신을 보여주는 것이다. 계시를 통해 우리에게 개념을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주심. 야훼의 말과 행위를 통해 직접 만나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를 통해 예수 자신을 만나야함. 부루너는 역사적, 인격적 인간 설명하며 만남의 신학으로 답변을 시도한다. 성서의 하나님은 한번도 개념화 되지 않음. 항상 행위로 happen하는 것이다.
계시는 movent of verbs'(동사의 움직임)인것 같다. 그 자신도 자주 나는 나를 애굽에서 이끌어낸 하나님이다. 이스라엘도 역사적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이해, 믿음. 법궤를 앞세우고 나감. 그러나 전쟁에서 져버림. 법궤자체 의미 없음. 법궤가 상징화되고 명사화 되면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이러다가 다시 성전 중심. 율법규례에 가두어지게 됨(유월절 속건죄, 등등)
A.D70년 기아로 많은 사람이 죽음, 성전무너짐 식인이 나타남. 이런 가운데 성전 재단의 불을 끄지 않음. 그러다가 피난감. 맛사다 전투(모두죽음). 신을 가두지 말고 명사화 시키지 말자. 항상 역사속에서 오늘도 HAPPEN하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가두는 것이 아닌가? 우리의 교리속에 교회속에 하나님 가두고 있는것 아닌가?
이 역사속에서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증언할까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역사는 떠나버렸는데 우리 교회만 붙들고 있다면 문제이다.
근본질문. 결국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는가? 신학을 통해서 무엇을 추구하는가? 역사내적 자기이익, 교회이익 추구하는것 아닌가? 교회지상주의로 나타날수 밖에 없다. 역사속에 나타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중요하다. 삼위 하나님이 함께하는 하나님나라 완성이 중요하다. 우리는 왜 이리 게으른가? 칼빈은 게으름을 원죄로 보았다. 타 학문이 우리 시대를 변화시키는데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교회를 통해 SECT화 시킬 것인가? 아니면 성육신, 역사속에 오신 그리스도를 맛보고 여기에 동참,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예언자적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