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답사기
본 자료는 3페이지 의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이미지를 클릭하여 주세요.
닫기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해당 자료는 3페이지 까지만 미리보기를 제공합니다.
3페이지 이후부터 다운로드 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개글

남한산성 답사기에 대한 보고서 자료입니다.

목차

1. 들어가는글

2. 산성가는길

3. 산성의 위치

4. 산성의 지형

5. 산성의 자연환경

6. 산성의 역사적 배경

7. 유적답사

8. 산성에 얽힌 전설 (벌봉에 깃든 정기를 날려버린 청태종)

9. 마치며...

본문내용

숭열전을 통해 올라오는 지름길보다는 더 멀지만 경사도 완만하고 길도 좋았다. 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고 이름을 붙여 전승문(戰勝門)이라 칭하였다. '전승문' 이란 싸움에 패하지 않고, 모두 승리한다는 뜻인데 현재 편액은 걸려있지 않다. 북문은 홍예식 문이며, 홍예기석 위에 10개의 홍에돌을 쌓아 구축하였다. 문의 폭은 325cm, 높이는 365cm이다. 육축은 특별히 가공하거나 큰 무사석을 사용하지는 않았으며 일반 성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7. 산성에 얽힌 전설 (벌봉에 깃든 정기를 날려버린 청태종)
여러 자료를 조사하던 도중 산성에 얽힌 전설을 보게되었다. 여러 전설이 있었는데, 우리역사의 아픔과 관련된 전설이 이채롭다. 아마도, 당시의 아픔을 잊지말자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는지...
남한산성 동장대지 동북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바위가 포개어져 가파르게 솟아 있고, 그 아래에는 사람이 간신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틈이 나있다. 이 바위를 벌봉 또는 벌 바위라고 부른다. 옛날부터 벌이 이 바위에 집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벌암, 벌바우, 벌봉이라 불렀다고 하며, 암문밖에서 이 바위를 보면 그 모양 또한 마치 벌과 비슷하다고 한다.
벌봉은 옛부터 영험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치성을 드리는 장소였다. 지금도 이 바위는 정기가 서려 있어 그 영험이 대단하다는 소문 때문에 치성을 드리러 오는 무속 신앙인들이 많다. 바위 주변에는 제단도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렇게 영험하다는 벌봉에는 청태종과 관련된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청나라 태종(태종의 고모라는 이야기도 있다)은 용골대를 조선에 비밀리에 보내어 남한산성의 지도를 그려오게 하였다. 명을 받은 용골대가 남한산성에 도착해 보니, 남한산성은 하잘 것 없는 조그만 산성이었다. 그래서 구태여 세밀하게 조사하여 지도를 그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여, 대강 대강 지도를 그리고 청나라로 돌아갔다. 그런데 용골대가 그린 그림을 받아 본 청 태종은 용골대에게 강의 위치, 조선 도성의 위치 등을 자세하게 물어 보는 것이었다. 용골대가 대답하기를, "강은 산성 서쪽에 있고, 도성은 강 건너편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크게 화를 내면서 꾸짖기를, "네 말과 같이 강과 도성이 서편에 있으면, 남한산성의 산세가 응당 남북이 길고 서북이 짧을 것이거늘, 네 어찌 반대로 서를 길게 하고 남북을 짧게 그려왔는가. 빨리 다시 그려 오라. 만약 명대로 하지 않으면, 네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이에 용골대가 겁을 먹고 다시 조선으로 들어와서 남한산성의 성곽, 바위, 골짜기, 언덕 등을 빠짐없이 살피고 지도에 그렸다. 그리고 다시 청나라로 돌아가지도를 바쳤다. 청 태종은 용골대가 그려온 지도를 보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그리고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이곳은 벌봉이라는 바위가 있는 곳이다. 이 바위는 천상 벽력성의 정기가 깃든 바위이다. 이 벽력성은 남극성이 범하게 되면 망하고 만다. 그런데 나의 주성이 곧 남극성이니, 만일 조선 국왕이 벌봉을 안에다 두고 성을 쌓았더라면, 우리 청나라가 쉽게 남한산성을 공격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벌봉이 성 밖에 있다. 장래에 우리가 조선을 공격하면 조선 국왕은 남한산성으로 피하게 될 것이다. 이때 우리 청나라 군사가 산성 밖에 있는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먼저 깨트리고, 벽력성의 정기를 말하면 산성을 쉽게 함락 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고는 조선 침략을 결정하였다. 마침내 청 태종은 조선을 침략하였고, 그의 예상대로 당시 조선의 임금이었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청 태종은 군사를 이끌고 먼저 벌봉으로 가서 바위를 깨뜨렸다. 그랬더니 바위 위로 연기가 나면서 벌봉에 깃들었던 벽력성의 정기가 흩어져 마치 벌떼와 같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이로부터 한달 후 청 태종은 남한산성을 공략하여, 마침내 인조의 항복을 받아 냈다. 후일에 나라에서 이 벌봉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는 다시는 임금이 무릎 꿇는 치욕을 당하지 않기 위하여 벌봉 밖에다 성을 재차 쌓았다고 한다. 지금의 벌봉이 마치 쪼개진 것처럼 틈이 벌어져 있는 것은, 병자호란 때 청태종이 벌봉에 어린 정기를 날려 버리려고 깨트렸던 자국이라고 한다.
8. 마치며...
본래 서울주변에는 서울을 지키는 외곽에 4대 요새가 있었다. 북쪽의 개성, 남쪽의 수원, 서쪽의 강화, 동쪽의 광주였다. 적들은 호시탐탐 이들 요새를 넘봤으니, 본래 요새의 운명이 그렇거니와 영광보다는 상처가 많았다. 다만 묵묵히 겨레를 품어 안고 후손의 영광에 안위하며 내달린 것이다.
동쪽의 광주에는 남한산성이 있었다. 광주산맥 주맥에 쌓은 15만9,859평의 남한산성은 오늘날 광주군 중부면 산성리에 속한다. 잘 정돈된 산길을 따라 30여분 올라가면 해발490m의 산세와 아름다운 굴곡을 따라 병풍처럼 둘러쳐진 야트막한 성곽을 만날 수 있다.
남한산성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삼국시대부터 전략적 요충지로서 방어지로서 이용되었다. 이는 남한산성이 구릉성분지라는 지리적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고, 우리는 여기서 과거 우리조상들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는 지혜를 엿볼수 있다.
이러한 남한산성은 서울에서 불과 30여분거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현재는 서울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나들이 장소로 변했다. 비록 음식점이 많아서 역사적 유적지의 의미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곳곳에 산재해있는 유적지는 아직도 우리들에게 많은 역사적 의미를 시사해준다.
때이르게 무더운 날씨라 답사하는데 조금은 힘들기도 했지만, 간만의 산행길이라 기분도 좋았고, 모처럼의 가족간의 산행이라 뜻깊은 시간이었다. 공부도 하고 심신도 단련할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 같다.

키워드

  • 가격1,200
  • 페이지수11페이지
  • 등록일2004.01.23
  • 저작시기2004.01
  • 파일형식한글(hwp)
  • 자료번호#242213
본 자료는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이 없습니다.
청소해
다운로드 장바구니